그런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수원에서 길을 떠날 때는 비가 내려도 구성면과 삼가동 경계를 이루는 신메주 고개(일명 정신병원 고개)에 올라서면 진눈깨비가 흩날려요. 그런데 용인 시내를 지나 정수리 초입 사기점 고개를 넘어서면 어느새 하얗게 눈이 쌓이기 일쑤죠.”어디 그뿐인가. 금박산과 정수산, 그리고 광주 태화산에 둘러싸여 늦게 해가 뜨고 일찍 해가 져 일조권이 가장 짧은 마을이다. 그런 연유로 ‘자식생산이 가장 잘 되는 곳’이라는 짓궂은 얘깃거리를 달고 다니기도 한다.
지리적 환경이 좀 특이하다고 설마 하겠지만 벼 품종 선택에서도 제한을 받는다. 이 마을에선 생장기간이 긴 만생종 벼를 심을 수 없다. 조중생종과 조생종만을 심어야 정상적인 수확이 가능하다.
44번 국가지원도로가 마을을 관통하는 신작로를 끼고 있지만 행정구역상 끄트머리인데다 고지대 깊은 골에 위치해 있어 예로부터 피난골로 불리었던 정수리.
마을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제주 고씨(濟州 高氏)가 들어오면서부터 알려져 있다. 입향조(入鄕組)는 문충공파(文忠公派) 기생(起生)인데 생존 연대는 기록이 남아있질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마을을 지키고 있는 고병훈씨(60)가 그의 11대 종손인 점을 감안하면 대략 350년 전으로 추정된다. 세보(世譜)에 의하면 그는 진사로 충주군(시) 점성동에서 태어나 양지군 주북면 정수동 선내곡(仙來谷)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돼 있다.
제주 고씨는 이웃동네인 식금리 세일(금곡)에 번성했고 마을엔 요즘 8세대 정도가 살고 있다. 50여 호에 달하는 세대 중 고씨 다음으로 터를 잡은 성씨는 이천 서씨(李川 徐氏)다. 구한말 개화파였던 서광범의 후손들로 시계 넘어 광주시 도척면 추곡리에 다소 분포돼 있기도 한데 현재 2세대만이 남아있다. 그 다음으론 연안 김씨(延安 金氏)로 알려져 있다. 6세대 정도가 살고 있다.
제주 고씨 ‘기생’ 처음 입향
본래 양지군 주북면 지역으로서 정수산 아래에 위치해 정수 또는 증세라 하였고 1914년 일제 당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기점, 서촌, 양달말과 병합, 양지면에 편입된 정수리. 골짜기 골짜기마다 주거공간이 분산돼 하늘이 아니고선 마을을 한꺼번에 볼 수 없다. 가장 중심이 선내골로 23호 정도가 밀집돼 있고 가장 처음 정착한 곳이다. 신작로에 위치해 지형적으론 중심인 오가터골에는 마을회관이 있다. 맞은 편 금박산 밑 동쪽에서 서쪽으로 공말, 광심재, 양달말, 서촌, 응달말이 차례로 있는데 ‘새랑 꾸미랑 어린이집’이 있는 공말엔 민가는 한 세대뿐이다. 광심재에는 6세대, 양달말 10세대, 아시아나 골프장과 연결되는 서촌에 3세대, 응달말 5세대가 각각 살고 있다.
‘피난 골’로 불릴 만큼 깊숙하고 차단된 골짜기지만 정수산과 태화산을 거쳐 모현 노고봉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등줄기는 한남정맥을 이뤄 백두대간에 연결된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한국 전쟁 당시 격전지가 돼 적지 않은 피해를 안게 됐다. 군사 이동로였던 관계로 태화산과 인근 삼막골에는 연대병력의 그들이 주둔했다. 양지와 김량장동에 있던 아군과의 포격전으로 많은 사상자가 나는 가운데 주민들 역시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전쟁 후 태화산은 발을 디디면 풀썩 풀썩할 정도였어. 양지고개에서도 많은 이들이 죽기는 마찬가지였고.”
예로부터 ‘물이 맑다’하여 정수리(定水里)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유래답게 마을 사람들은 물 걱정만큼은 안하고 살았다. 선내곡에 있는 ‘향나무 우물’은 특히 대대로 전 주민이 사용하는 공동우물이었다. 아침나절이면 줄줄이 보리쌀을 이고 와 씻고, 한 여름밤이면 남녀노소 등목을 하던 곳이었다. 이 마을의 입향조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수 백년 된 향나무 고목과 어지간한 가뭄에도 마를 줄 모르고 샘솟는 물줄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 물줄기가 흘러들어 연못을 이루고 그 위에 연꽃이 피어있는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이래서 향나무 우물은 이 마을의 생명수이자 상징이기도 하다.
‘기남이 고개’ 주민가슴 속 영원히
정수리 주민들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외지인들의 토지 점유율 20%미만일 정도로 아직 투기바람이 크게 미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걱정이 있다. 마을을 이어갈 미래 세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50여 세대가 살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단 1명, 그마저 내년엔 입학생조차 없다.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은 반세기 전과 비교하면 더욱 이해가 된다. 응달말 M.I.T공장 터가 옛날 초등학교 자리다. 권공영(작고)씨의 도움으로 정수초등학교가 마을에 있었지만 폐교된 지 오래돼 지금은 한터초등학교 학군에 포함돼 있다.
모든 길이 고개로 통하는 마을주민들에겐 그에 얽힌 얘기들이 적지 않다. 용인에 남아있는 고개중 가장 굴곡과 경사가 심해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기막고개. 오래 전엔 떼강도가 곧잘 출몰해 소판 돈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가슴속에 깊은 감동으로 간직하고 있는 고개는 역시 ‘기남이 고개’이다.
그 주인공 고 박기남씨(1913∼1985)는 잘 알려진 대로 이 마을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양지초등학교를 채 졸업도 못하고 서울로 떠나 결국 사업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린 시절 한이 됐던 가파른 산길을 개인 돈으로 뚫어 주민들의 숙원을 풀었다. 이러한 선행은 당시 동아일보(1960년 10월 12일자)에 소개돼 화제가 된 데 이어 기남이 노래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큰 감동을 주었고 주민들은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울고만 넘던, 이 십리 고개 길이 얼마나 슬퍼, 눈물로 한숨으로 한이 되었나, 산새도 벗을 삼는 그 시절 생각나는 기남이 고개….”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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