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의 상징 느티나무 군락. 매년 4월초파일이면 그 밑에서 고사와 함께 마을축제를 열었다.


“논 다랭이나 좀 갖고 있던 사람들은 떼부자 돼서 나갔어. 땅이 우리건 아녀도 집등기까지 냈는데 몇 천만원 주고 나가라니 말이 돼나? 끝까지 버틴 옆집은 평당 300만원씩이나 받았다는데…우리 아들이 2억은 줘야 나간다고 했대나 봐.”

평범한 농촌 아낙으로 살아왔을 것이 분명한 강구만(여·83)할머니. 택지개발로 황량한 벌판이 돼 버린 외진 구석에 덩그러니 남아 살고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산골짜기까지 파고 든 개발업자들의 탐욕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판에 그래도 한 몫 챙겨야 한다고 버티는 세입주민을 나무라야 할까. 돈 앞에 평상심을 잃고 어느새 이기심이 맞부딪치는 각박한 마을로 변한 신봉말이다.

신봉리는 일제시대 때 대대적인 행정지명 개편을 하면서 만들어진 합성지명이다. 당시 신리(新里)와 서봉동(棲鳳洞)을 합하고, 두 마을에서 한 글자씩 취해 신봉리라 했다. 신봉말은 홍천말과 중말, 양지말로 구성돼 있다.


붉은 피가 흘렀다 하여 ‘홍천말’

중말과 양지말은 대대로 용인 이씨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서봉말의 기계 유씨, 인근 성복리 성남마을의 성주 이씨, 성서마을의 경주 김씨 일부를 제외한다면 성복리와 신봉리는 포곡면 유운리 신원리와 함께 용인 이씨들의 대집성촌이었다. 신봉말 초입에 있는 홍천말은 본래 남양 홍씨가 많았던 곳으로 ‘홍씨 마을’이라는 뜻에서 마을 지명이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또 홍천(紅川)에서 유래된 명칭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수지일대 지명을 연구하고 있는 이석순씨(수지농협 전무)의 해석은 다르다. 남양 홍씨가 많이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을이름과는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유를 마을 명으로 쓰는 넓은 홍(洪)이 아닌 붉은 홍(紅)을 쓰고 있는데서 찾는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광교산에서 형재봉으로 넘어오다 다시 한번 우뚝 솟은 봉이 있는데 이 봉을 광교산과 형제 봉 사이에 있다고 해서 가운데 봉이라고 하죠. 여기서 서봉사 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를 용마등이라고 합니다. 이 산줄기 가운데는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 까지 호령할 영웅이 나온다는 명당이 있었다 해요. 이런 기미를 안 일본인들이 어느 땐가 이 산줄기를 끊었는데 그 자리가 지금도 선연합니다.”

지명은 바로 여기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이 혈을 끊은 자리에서 피가 치솟아 홍천말 앞까지 이르렀다 한다. 이처럼 붉은 피가 흘렀다 하여 ‘홍천말(紅川)’이 됐다하니 꽤나 아픈 역사를 안고 지어진 이름임에 틀림없다.

깊은 골을 이뤄 서봉사를 비롯한 많은 절과 암자가 있었던 이 일대가 요즘처럼 홍역을 앓는 지역으로 바뀐 건, 지난 95년부터다. 토공에 의해 풍덕천리와 성복리 일원을 포함한 이 일대 13만여평이 ‘신봉지구’로 지정돼 지난 해 6월 택지개발에 착수했다. 2003년말까지 준공한다는 계획에 따라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다. 지정 지구 외에도 민간업자들이 개별 승인을 내 추진하는 아파트 사업을 합하면 신봉말 일대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이 멀지 않았다.

100여 가구가 넘었던 마을에 토박이는 얼추 15가구 미만이다. 대신 택지개발 소문이 돌고 이어 개발 붐이 본격화되면서 입주권을 노린 조립식 임시주택이 대거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예전만 해도 논과 밭의 비율이 절반 정도씩이던 농토는 사실상 없어져 버리고 소일거리 삼아 가꾸는 텃밭이 간간이 보일 뿐이다.


‘마을숲’ 나무 타지로 팔려나가

홍천말과 풍덕천리 사이에는 교인들이 1만명 이상 된다는 초대형 ‘지구촌교회’가 들어서 마을을 압도하고 있다. 교회가 들어서기 전부터 전통적인 마을신앙으로 내려오던 거리제가 그리 활성화 된 마을은 아니었다.

다만 신봉말을 상징하는 느티나무 군락에 단오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오래 전부터 전승돼 왔다. 수 백년 고목부터 수십년생 나무까지 일렬로 늘어서 있는 성황목 군락은 유일한 마을 신앙의 대상이었다. 오월 단오날 가장 오래된 나무에 제사를 지낸다. 아침 일찍 마을 고령자를 중심으로 예닐곱명이 모이는데 제물에 쓰이는 것은 이장을 중심으로 마을 청년들에 의해 이뤄진다.

고사가 끝나면 단오제 축제가 이어지는 데 그네뛰기와 노래자랑이 벌어진다. 매년 4월 초파일, 청년회 회원들을 주축으로 새끼줄을 꼬아서 느티나무에 미리 매달아 놓는다. 마을 축제가 끝나면 그날 저녁 새끼줄까지 태워버린다. 인근 행정기관 책임자를 비롯한 지역유지들이 몰려와 격려까지 해주던 단오날 마을축제는 이제 영원히 주민들의 추억 속으로만 남게됐다.

홍천말 일대 민간 택지사업을 진행중인 LG건설 관계자는 느티나무 군락을 귀히 여기는 주민들의 마음을 살려서 잘 보존하겠다는 다짐이다. 이를 위해 주변까지를 포함하는 공원계획을 마련하고 용역을 의뢰한 단계라고 말한다.

신봉마을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마을 숲’이다. 풍덕천리에서 광교산(서봉산) 깊은 골로 들어서는 초입마을이었던 만큼 동네를 정화하고 부정을 물리치고자 했던 축귀(逐鬼) 기능으로서의 마을 숲이 대대로 정성스레 보존됐다.

“한국 전란 당시, 혼란 중에 원주민과 피난민들이 땔감이 없어 고생할 때도 그 나무 숲 만큼은 못 건드렸지.”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있는 토박이 어른의 말속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대대로 이어온 삶의 공간이 해체되고 그 안에 뿌리를 내렸던 주민들이 흩어져 버린 탓만이 아니다. 마을을 상징하고 수호하던 숲의 소나무들이 모두 뽑혀 팔려 나갔기 때문이다. 수 백년된 소나무 중 일부는 풍덕천리 어느 공원에 옮겨져 그곳 사람들의 그늘이 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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