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집터와 논밭이 있던 자리를 불도저로 벌겋게 밀어버려 가뜩이나 생기 없는 마을이 횅댕그렁하다. 여기저기 뿌리 채 뽑혀 말라죽어 가는 고목이 나뒹군다. 택지개발에 밀려 누대로 내려온 삶의 근거지를 버려 두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떠나갔기 때문이다. 떠나간 사람들이나 아직 옮길 곳을 정하지 못해 남아있는 주민들 대개의 마음과 처지가 저 고목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이태 전, 본격적인 이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보정 1리 연원마을은 50호가 넘었고 약 121세대에 달했다. 원주민은 대부분 큰 농토는 없었지만 농사를 주업으로 살고 있던 곳이다.


“법도 법이지만 인정이 있어야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죽전택지개발지구에 포함된 연원마을은 이제 대부분이 주민들이 이사가고 현재 12호가 남아있는 상태다. 이들도 본래 계획대로라면 진작 마을을 떴어야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새로 집을 짓거나 마련 중인 경우다. 다른 하나는 아예 갈 수 있는 곳을 마련할 수 없는 막막한 처지의 주민들이다. 배규환씨(64)가족과 최재덕씨(68)가족이 여기에 해당한다.

“남의 논이긴 해도 6000여평에 열심히 농사지어 먹고 살았는데 단돈 460만원을 주고 나가라고 하니 말이 돼여? 법만 가지고 사나, 인정이 있어야지…”

배씨는 서너 해 전 이사 온 세입자다. 이웃 독정마을, 종근당 목장에서 목부로 일하던 그는 10여년간 소를 키우면서 살았다. 그런데 분당선이 들어오면서 차고지 부지에 수용돼 집이 헐리고 연원마을로 이사했다가 또다시 마을을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됐다. 여태껏 이사를 다섯 번씩이나 다녔다는 그는 땅하나 없이 남의 농사를 지었던 탓에 보상으로 받을 것이 없다. 세입자인 탓에 그가 받은 것은 이사 보조비용으로 받은 고작460만원. 거기에다 빚마저 지고 있는 상태여서 그저 막막하기만 한 상태다. 더구나 며칠 전 빨리 떠나지 않으면 강제로 집행할 수밖에 없다는 2차 계고장마저 날아들어 가슴속이 타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신작로에 위치한 각성바지 동네

‘연원마을은 보수원(寶樹院)이라고도 했다. 마을 동쪽 ‘연원이 고개(蓮院峴)’넘어 언남리가 고려시대 이래 현의 치소(治所)였던 관계로 과거 원(院)근처였다는 뜻으로 유래됐다고 한다. 또 연원은 마을에 큰 연못이 있고 거기엔 연꽃이 많아 연원(蓮院)으로 불리었다고 하나 지금은 노인들의 추억 속에 있을 뿐 없어졌다. 현재 마을 회관 터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연못과 정자목은 이 마을 주민들 누구에게나 가슴속 깊이 남아있는 추억의 장소이자 상징이다. 마을 신작로에 위치해 있던 정자목은 늘 주민들이 모이는 모임터이자 쉼터였기 때문이다. 북쪽방향으로 독정마을과 맞닿아 있는 연원은 깊은 골짜기는 없이 방아골, 원골, 가재골 정도다.

동래읍성에서 출발해 밀양∼대구∼충주∼용인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옛길인 영남대로 450㎞. 조선의 9대 대로 가운데 하나로 군사도로이자 임금의 행차길이며 선비들이 과거길이던 영남대로가 바로 연원마을을 통과했다. 영남대로와 접했다는 지리적 환경은 이 마을 주민들의 삶 전반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연원에는 대성(大姓)이 없다. 각성바지다.


서울로 향하는 마지막 마방간

경주김씨, 경주최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등이 서너호씩 살고는 있었지만 뿌리가 깊지도 못하다. 다만 일가없이 한 집밖에 없었지만 세도가 어른이 있긴 했다. 정암 조광조의 종손집으로 마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 많은 노비를 두고 세도를 부리며 살았다. 일제때는 일본 관리들이 부임인사를 하러 들렀던 집이었다 전한다. 유일하게 그의 한양조씨만 사당이 있었는데 6.25 폭격때 없어지고 후손들도 마을을 떠난지 오래다.

아무튼 각성바지라는 점 역시 신작로에 위치한 마을 입지조건상 오가다 정착한 주민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오랜 행정의 중심지가 바로 인근에 있어 지역수령이 올 때마다 함께 했던 식솔과 관리들이 주로 거주했고 자연스레 주민이동이 심했다는 것이라는 것이 노인들의 얘기이기도 하다. 또 기름지고 너른 농토가 마을 안에는 없어 대부분 소규모 자작농이거나 소작농도 적지 않았다. 가난한 주민들은 춘궁기에 쌀과 보리를 빌린 다음 가을 추수기에 갚는 일이 빈번했다. 이자가 50%나 붙는 장려쌀(長利쌀)을 봄에 빌려 가을에 절반을 얹어 갚아야 했다. 이처럼 가난했던 주민들은 땔나무는 지고 왜꽂이 고개를 넘고 서원말을 지나 쉰 다음, 독바위 고개를 또 한번 넘어 수원장에 내다 팔았다. 수원이 20리 길, 수원역전까지는 30리 길이었다.

어느 마을이건 주민을 엮어주는 모임이 있기 마련이다. 부녀회나 청년회 등을 제외하고도 연원엔 행여계라고도 불리는 상포계가 있었다. 이현(보정 4리)과 함께 계를 운영했는데 계원은 30여명이 됐다. 계원이 아닌 다른 사람이 상여를 쓸 때에는 돈을 받았고 그 돈을 모아서 상여 고칠 때 비용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아직도 마을을 지키고 있는 김정환(73)씨를 비롯해 곽종화·권득호씨 등이 나서 만든 ‘연원일동친목회’도 활성화됐던 모임이다. 매달 1천원씩 각 세대별 대표가 모임에 가입해 마을 대소사를 함께 처리했다.

영남대로변에 있었던 이 마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마방간’이다. 마방간은 말과 소를 끌고 서울로 가는 사람들이 소마와 함께 묶어가던 곳으로 현재 627번지 김정환씨의 집터다. “어려서 아버지의 마방일을 도우면서 성장했어. 상주와 안동사람들이 많이 올라왔고 백암에서 하룻밤을 묶어 왔던 것으로 기억돼. 우리 집이 동대문 우시장으로 가는 마지막 숙소고 들었지.”지난 해 세상을 떠난 그의 선친 김문억이 운영했던 마방은 송파 우시장이 쇠퇴하면서 상대적으로 동대문 우시장이 활성화되자 덩달아 번성했다.

연원마방은 여주에서 출발해 송파에서 1박을 목표로 가던 행로가 양지를 거쳐 연원마을에서 1박을 한 후 이른 아침을 먹고 동대문시장으로 향하기도 했던 곳이다. 또 안성에서 수원으로 가던 행로의 일부가 연원마을에서 일박한 후 이른 아침에 먹고 동대문 시장으로 길을 잡기도 했다. 가장 많았던 행렬은 죽산이나 경상도 상주에서 올라온 이들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동대문 시장으로 향했다.


달맞이봉 다시 오를 수 있을까

판교에 주점이 있었지만 마굿간이 없어 이곳 연원마을 마방을 더욱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방의 구조는 일반집과는 달리 길게 서서 12∼13칸이 되는 곳에 소가 많게는 40여 마리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칸이 모자랄 때는 신작로에 말뚝을 박아 임시 방편으로 소를 재우기도 했다. 소를 맡긴 사람들은 따로 잠을 잤다. 방은 3∼4칸이 됐는데 한 방에 몰아서 들어갔다. 소몰이꾼 한 사람이 많게는 다섯 마리까지 소를 끌고 왔다. 요금은 숙식한 다음 날 아침 식사 이후에 사람과 소를 따로 계산해서 받는다. 새벽 첫닭이 울기 전에 쇠죽을 먹이고 떠나면 동대문 우시장 개장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한다.

이제 머잖아 그나마 남아있는 10여 세대마저 떠나버리게 된다. 신작로 사람들답게 예로부터 정자목 아래 앉아 과거보러 가는 선비나 여행객들에게 짓궂은 텃세로 술을 얻어먹기도 했다는 연원마을 사람들, 정월대보름이면 어느 해든 빼놓지 않고 대개 주민들이 달맞이봉에 올라 한해 소원을 빌고 마을 안녕을 기원했다는 이들이다. 돌아 올 새해 정월보름에도 달맞이 봉에서 이들은 만날 수 있을까. 수백 년 전통이 더 이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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