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정보고 설립자 심영구 이사장

고향에 실업교육의 장 없어서야…

심선생이 고향인 용인에 실업고등교육의 씨앗을 뿌린 것은 지난 1973년. 그는 그해 모교인 경기상고에서 25년 동안 잡아오던 교편을 놓고 고향에 돌아왔다.

“모교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고 이들이 곳곳에서 이 사회에 기여하게 됐지만 고향 후배들은 그렇질 못했어요. 당시 현실적인 여건상 대학진학이 어려우면서도 지역 내에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실업교육의 장이 없었거든요. 고향에서 후학들을 가르쳐 사회에 진출시키는 게 훨씬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학교 설립자금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용인출신으로 경기상고 제자(전 한국화약 부사장) 등이 문방구 가게를 내도록 도와주고 물건까지 팔아주는가 하면 독일 가는 광부와 간호사에게 독일어를 지도했더니 직접 지은 책까지 사 가지고 가는 바람에 조금씩 모아오던 통장이 제법 불어났다. 티끌 모아 동산이 된 셈이었다. 그는 이를 몽땅 보태서 고향 학교에 묻었다. 거기에다 고림동 자신의 생가 터와 주변 논밭을 매입해 어렵사리 6000여 평의 부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74년 상과 180명 뽑아 개교

73년 학교법인 덕영학원 인가를 받아 꿈에 그리던 후학들의 터전인 용인상고를 설립해가던 과정은 그야말로 심영구 선생과 학생, 그리고 교사가 함께 맨손으로 벽돌을 쌓다시피 한 것이었다. 논밭을 메워 그 위에 교실 8개를 짓고 1974년 상과 3학급 180명의 신입생을 뽑았다. 개교는 했지만 어느 한 곳도 정리된 곳이 없어 하루하루 쌓아올리고 정리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번듯한 교정이 마련됐다. 어느덧 25회에 걸쳐 졸업생 1만명 이상을 이 사회에 배출시키고 현재 30학급에 1500여명의 학생들이 재학중인 용인정산고를 이 지역 인재 양성의 산실로 성장하도록 만든 장본인 심영구 이사장.

고림동 이진말에서 1922년에 태어나 일제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나라 잃은 설움과 가난이라는 이중적 고통에서 성장해 나갔다. “할아버지는 일본사람이 싫어서 장날만 외출을 했고 큰아버지는 공출을 거부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간 일도 있었어요. 당숙은 일제 36년간 상투를 깍지 않으시고 견디어 냈지요.”

육남매의 장남으로 가난 속에서도 원대한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용인초교와 경기상고를 거쳐 1942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길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수재 소리를 듣곤 했었지만 동경상과대학 예과시험에서 보기 좋게 첫 낙방의 쓴 맛을 보고 말았다. 다음 해 와세다 대학 고등학원(예과)에는 합격했으나 목표가 아니어서 역시 포기하고 다음해에는 일본에서 제일 어렵다는 동경 제1 고등학교 시험을 봤다.

그러나 운명은 아버지의 별세로 갈리고 말았다. 시험 보는 바로 그날, 요절 전보를 접한 심영구는 잠 한숨 못 자고 고민하다가 1차 시험만 합격한 채 청운의 꿈을 접고 급거 귀국했다.

어머니를 도와 다섯동생을 돌보면서 고학으로 동국대를 다녀야 했던 그는 돈벌이가 되는 일이면 마구 대들었다. 점원, 사무원, 가정교사, 번역사, 통역, 아르바이트 등등. 본인의 적성이나 장래성을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한 때는 많은 동생들 학비를 대려고 종로에 있는 천보당 금은방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날 바닥에서 자다시피 했던 시절이 제일 기억에 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그가 교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49년 9월, 경기상고 은사이신 맹주천 교장선생님의 부름 때문이었다.

그의 별명은 ‘보따리 장사’

사회는 어지러운 가운데 일제하에 찌들고 미군의 화려함에 열등의식을 느끼고 있을 때, 미군 통역생활을 청산하고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후진들을 잘 가리켜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막연한 생각만이 그의 머리 속을 채웠다. 그 때가 해방되던 1945년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경기상고 25년, 직접 설립한 용인정산고 20년 등 45년의 현직 교사직을 마감하고 이사장으로서의 직책만을 수행하고 있는 심영구 선생. 그가 일궈낸 100%에 이르는 취업 신화 뒤엔 에피소드가 적지 않다.

‘보따리 장사’라는 별명도 그때 지어졌다. “가방 속에 제자들 이력서를 넣어 가지고 각 기업체를 찾아 다녔어요. 잘 모르는 업체가 많다보니 때론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서울과 고향에서 근무하는 동안 어림잡아 1만여명 이상의 이력서가 내 주머니를 스쳐갔어요.”

그러나 80∼90년대 들어 사정이 달라지기도 했다. 경제가 발전해 앉아서 취업을 시키게 되자 당시는 ‘가네, 안가네’하고 학생들이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다보니 3D업종 기피현상을 막으려고 오히려 그 비위 달래느라 안에서 땀을 빼야 했다.

삼성·현대 등 굴지의 기업체에 많은 제자들이 취업하고 있지만 그중 유독 한화그룹에 많다. 중견 간부들 중에도 용인정산고 출신들이 적지 않다. 이 같은 결과는 심이사장과 한화(전신 한국화약) 설립자인 고 김종희 회장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충북 천안사람이었던 김종희 회장은 경기상고 당시 그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평생을 교육자의 한길로 살아가고 있는 심영구 선생. 그의 좌우명은 정도역행(正道力行)과 한중락(汗中樂)이다. 전자는 ‘바른 길로 힘써서 가라’는 뜻이요, 후자는 땀 속에 즐거움이 있다는 말이다. 근 30여년 동안 자가용 없이 버스로 출퇴근을 할 정도로 평생 청빈함을 실천하고 후학양성에 힘써온 외곬인생이었기에 그의 좌우명은 천근만근 무게로 우리 가슴에 다가온다.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