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7월17일 제53회 제헌절을 맞아 용인시법원 전충환(63) 판사를 찾았다. 2000만원 미만의 소액민사재판이 열리고 있는 시법원은 서민들의 고충과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곳으로 시민들의 법질서 의식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되고 있다.

40년 가까이 법조계에서 일해온 전 판사는 수원지법 서울지법 부장판사 등을 역임하고 15년간의 변호사생활을 거쳐 지난 98년 9월 시군법원제도가 창설되면서 용인시를 지원, 부임했다. 전 판사는 화려한 경력을 뒤로하고 법원의 말단조직인 시군법원 발령을 자원해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시법원의 원로판사로 그동안 지켜 본 용인시민들의 법의식 실태와 이제 정착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시군법원 제도의 실상에 대해 전충환 판사에게 들어 보았다. <편집자>

매주 목요일이면 역북동 용인시법원은 시민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2000만원 이하 소액소송재판이 열리는 이 날 각종 사건을 들고 법원을 찾는 이들의 대부분은 서민들. 소송비용도 없고 전문가의 자문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이 분쟁에 휘말려 마구잡이로 법원 문을 두드리고 있는 실정이다.

“시군법원의 판사는 판결 본연의 임무보다 재판에 필요한 법절차와 형식을 일러주는 변호사의 역할에 본의 아니게 더 치중해야 합니다. 재판은 법에 엄격한 기준을 두고 절차와 형식에 맞게 진행돼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장도 내지 않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거든요. 법대로 하자면 이런 경우 원고의 청구를 기각해도 그만이지만 그러면 시군법원의 존재 의미가 없어지지 않겠어요?”

그러나 절차를 일러줘도 “그런건 법원에서 알아서 해주는 것 아니냐”며 따지는 사람들도 상당수라는 것.

“소액소송재판에 관련된 사람들의 대개는 순박한 서민들이에요. 억울한 심정만으로 법정에 서는데 법절차가 무시됐기 때문에 결국 패소하게 돼 있어요. 축구경기에 임하는 선수가 경기규칙을 몰라 제대로 시합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면 돼요. 심판이 양편의 선수들에게 룰을 일일이 가르쳐주며 경기를 이끌고 있는 형편입니다.”

판사의 이같은 역할은 일반법원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시군법원이 갖고 있는 특수성이기도 하다.

절차 형식 무시한 소송 다반사
전충환 판사가 하루에 다루는 소액민사재판 건수는 보통 80여건. 그러나 IMF사태가 벌어졌던 부임 직전에는 하루 재판 건수가 무려 200여건에 달했었다. 주로 제2금융권의 소액 채권을 얻어 쓴 서민들이 빚을 갚지 못해 무더기로 제소 당하는 사례가 빈번한 때였다.

소액민사소송을 다루다 보면 갑갑한 일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조금씩 양보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권리와 감정만 앞세워 끝내 더 큰 손해를 자초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되도록이면 양쪽 모두에게 양보와 화해를 권합니다. 몇 백만원 더 받으려고 항소 해봐야 거기에 들어가는 변호사 비용에다 시간까지 합하면 결국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게 돼 있어요. 대법원에서 굳이 원로판사를 시군법원에 배치한 것도 그간의 경험과 나이든 사람으로서의 위엄을 바탕으로 중재와 판결을 이끌어 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판사의 중재를 즉시 받아들이는 경우보다는 몇 달씩 재판을 거듭한 끝에 양보하는 사례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주민들끼리 법정에서 오래 다투게 되면 악감정이 생기게 마련이에요. 오랜 경험을 가진 나이든 판사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도 법질서에 순응하는 것이지요. 분쟁을 빨리 끝내게 하는 것이 지역 인심 순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전충환 판사는 시군법원일수록 그 지역 출신의 원로판사가 임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주민들을 잘 아는 사람으로 주민들과 삶의 현장에서 함께 어울리며 분쟁시에는 직업 판사의 입장에서보다는 지역의 어른으로 법질서에 입각하여 화해를 조언할 수 있는 위치가 돼야 한다는 것.

“시군법원 제도의 발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사실 대법원 판결보다 주민들은 자신의 이권이 걸려 있는 시법원 소송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거든요. 시군법원은 대법원의 말초신경과 같은 곳입니다. 여기서 준법정신을 키우고 법질서를 올바르게 정착시켜 나가야 돼요.”

시법원 법질서 정착의 기초돼
전충환 판사는 올해 말로 정년을 맞는다. 한평생을 법조계에서 일해온 그는“판사노릇 하기가 더 힘들어진다”고 고백한다.

“그동안 내가 내린 판결 가운데 잘못된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고민이 오더라구요. 내 자신이 잘못된 판결인지도 모른채 무심코 넘겨버린 재판들도 있겠지요. 그런 경우 피해자들은 가슴에 한을 품게 되지 않겠습니까?”

전 판사는 특히 항소가 어려운 소액재판을 맡으면서 서민의 진실이 사장되지 않도록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

3년전 수지 광교산 자락에 거주지를 정한 그는 남은 여생을 이 곳에서 보낼 생각이다. 처음 용인에 정착했을 무렵 정치적인 야심을 위해 이주한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의 시선도 주변에서 받아야 했다. 그러나 순수하게 법조인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이제 의심을 품는 사람은 없다. 정년 후의 꿈 역시 법조인으로 법적 지식과 경험을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것.

“콜럼부스는 67세 되던 해까지 미대륙을 횡단했다고 합니다. 지금 내 나이가 결코 많은게 아닙니다. 퇴임 이후에도 법률 자문이나 노인대학 강의 등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도움을 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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