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 연구의 개척자 국중일

“용인에 태어나서 용인 땅위에 발을 디디고 이 땅에서 나는 양식으로 배를 채우고 살아가는 우리가 또 자손들이 영대 살아나갈 이 고장이 어떠한 과거를 가졌는가, 또 우리의 선인들이 이 고장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아볼 의무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후배들의 손에 의해 깎고 다듬으며 살을 붙여서 보다 더 훌륭한 내 고장 역사의 글이 만들어지기를 빌면서 이 글을 쓰는 바이다.”

지난 1958년, 한 고등학교 교사가 꼼꼼하게 직접 손으로 써 내려간 ‘용인사’라는 소책자를 엮으면서 소망과 바람을 이렇게 서문에 써 놓았다. 그로부터 43년. 그의 간곡한 기대는 과연 어느 정도 이뤄졌을까. 시 문화원과 시사편찬위, 그리고 향토사를 연구하는 적지 않은 후배들 손에 의해 수십 종의 향토사 관련 책이 발간됐으니 적어도 양적으로는 그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진 않았을 듯 싶다. 85쪽 분량으로 여러 부수를 제작해 주로 학생들을 통해 퍼져나갔던 이 소책자 지은이는 국중일(78)교사로 당시 그는 태성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미 교직을 은퇴해 서울에서 조용히 노년을 보내고 있는 그는 사실상 용인향토사 연구의 첫걸음을 뗀 선구자이자 1세대였다.

어느 학문이든 한 단계 한 단계씩 축적을 통해서 발전해 나가기 마련. 특히 향토사학에 대한 관심이 대중화되기 전인 50년대 중반부터 미지의 영역에 관심을 쏟아 용인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그의 열정과 성과는 후배 향토사 연구자들의 귀감이자 사표였다. 그런 만큼 낡은 소책자 하나를 남기고 60년대 중반 홀연히 용인을 떠나 버린 그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호기심과 관심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어렵게 연락이 닿아 찾아가 그를 만난 것은 17일 저녁, 서울 종로구 무악동에 있는 서대문 독립공원 부근의 한 식당이었다. 그는 80줄에 가까운 노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건장한 체격에 혈색 좋은 얼굴이었다.

지역알기 차원에서 시작

-선생님께서 용인 향토사 연구의 첫 발을 뗀 분이란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연구를 시작하게 됐는지요?

“50년대 중반인데 미국에선 ‘소사이어티 스쿨’이라고 해서 지역사회 특성에 맞고 지역사회를 인식시키는 교육이 강조됐어요. 당시 우리 나라 교육당국에서도 이를 적극 정책적으로 권유했지요. 그것이 아니더라도 서문에 썼지만 남의 역사는 잘 알면서 우리역사, 또는 지역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경향이 있었어요.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어떤 방식으로 연구를 하셨습니까?

“일단 학생들에게 과제를 줘서 주변을 조사해 오도록 했어요. 이것을 바탕으로 현장조사를 나갔죠. 또 오래도록 지역사회를 지켰던 주민들로부터 많은 자료 지원을 받았지요.”

그가 쓴 「용인사」가 현대에 들어 사실상 처음 쓰여진 향토연구서라는 점도 인정을 받는 부분이지만 그보다도 그 내용일 것이다. 그는 역사이전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정사에 기초해 용인의 변천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과 아울러 지명유래나 설화까지 일부 기록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쟁점에 대해선 나름의 논리를 통해 비판과 반박도 서슴치 않았다.

박용익 전문화원장, 홍순석 강남대 교수 등과 함께 용인 향토사학계 2세대를 상징하는 이인영 문화원장은 “당시 그의 책을 통해 향토사에 눈이 떴다”고 최근 밝힌 바 있다.

-혹시 참고한 향토사료가 있었습니까?

“태성중고 초대 교장이었던 신현정씨가 쓴 용인읍지라는 것이 있었어요. 요즘 시사연대표처럼 만들어진 한 두어 쪽짜리였는데 어쨌든 나보다 먼저 지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정리를 했다는 점에서 그 분을 효시로 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내가 그나마 향토사 자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역사의 전체적 맥락을 짚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때 정치권에 외도

-소책자의 글씨가 정성스럽기도 하지만 그림까지 그려 넣은 것이 인상적인데 직접 그렸나요?

“아닙니다. 당시 400자 원고지에 정리한 것을 마침 군대에서 막 제대했던 동생이 작업을 한 것이죠.”

-향토연구서는 소책자 한 권 이외에 없었습니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또 한 권이 있었죠. 첫번째는 알려진대로 고려시대까지의 지역사를 살핀 것이고 조선시대는 별도의 한 권으로 원고를 마쳤습니다. 돌칼 등 시대를 고증할 수 있는 실물은 물론 사진을 일일이 찍어 출판을 하려 했는데 5.16당시 원고를 비롯한 일체를 출판사가 분실하는 바람에 세상에 나올 수 없게 됐어요. 지금까지도 그 부분은 말할 수 없이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국중일 선생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엔 그를 교사이자 향토연구의 길을 연 선구자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에 깊숙히 개입했던 인물로도 알고 있다. 그는 그 배경과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본래 학교 재직 중에도 고등고시를 줄곧 준비하고 있었지요. 16년 5.16후 고등고시와 똑같은 공무원 특채시험이 있었는데 366명중 수석으로 합격해 서기관이 되면서 학교를 떠났습니다. 처음엔 국가재건최고회의 내 국민운동본부에서 행정과정으로 일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치쪽으로 자꾸 끌어들이려 해서 격하게 다투기도 했지요. 결국은 내키지 않는 정당에 관여해 잠시 공화당 용인군 지부장을 하다 서울에 있는 경기도당에서 선전부 일 등을 한 적이 있어요. 끝내는 3선개헌 반대입장을 굽히지 않아 정치를 떠나 다시 교육계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용인은 분명 제2의 고향”

교육가이자 용인향토사 연구의 개척자, 그리고 정치권에 휩쓸리기도 했던 국중일. 그에겐 그간 알져지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인생역정이 있었다. 일제치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복역까지 한 사실로 그는 최근에야 이를 옛 교직동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털어 놨다.

“교육의 길로 들어선 후 과거 경력이 괜히 나에 대한 편견을 낳을 수도 있고 정치와 연관해 바라볼 수 있어 숨겨 왔었죠. 지금은 그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평양사범대학에 합격을 하고도 당시 당숙이 독립운동 관련 구속 중이란 이유로 신원조회로 불합격 처리돼 부활된 철도학교에 재직 중일 때였다. 이유는 친구들과 함께 역사 서적을 읽고 주위에 권유하는 한편 병으로 귀향한 친구에게 ‘조선민족임을 자각하라’고 한 편지가 통신검열에 걸린 때문이었다.

경성유학생동맹 조직사건으로 부풀려져 용산경찰서 고등계에서 모진 물고문을 당하는 한편 법정에서 징역 3년, 금고 1년을 언도받아 3년이상 복역 중 해방으로 인해 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
지금도 노인대학 강사와 주례 등으로 현역시절 못지 않은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국중일 선생.

“황해도 평산이 고향이지만 6.26전쟁이 인연이 돼 용인에 정착해 어머니는 74년까지 용인에 거주했어요.”

더구나 10여년 동안 향토사를 개척한 그에겐 여전히 “용인은 제2의 고향”이라고 분명하고 거침없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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