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올해를 ‘지역문화의 해’로 지정해 각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새롭게 재조명해 보고 이를 활성화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그러한 계획과 무관하게 용인지역사회에는 오랜 역사성과 특성을 지닌 고유한 정월 대보름 민속 전통놀이가 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의 민속놀이는 노동 기초단위인 마을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나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그 맥을 이어나가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문화제 형식과는 별도로 고유한 전통을 장점으로 한 민속놀이를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지역축제’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도 하다. 이에 정월대보름에 용인지역에서 행해지는 마을 전통 민속놀이중 대표적인 것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유방동 지장실 줄다리기□

유림동 지장실은 용인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성산줄기의 가파른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산줄기를 담장으로 삼아 자리한 지장실은 예로부터 밀양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본래 척박한 땅이었다. 좁쌀보다 낟알이 조금 굵은 식용작물, 기장을 많이 심는 골짜기인 ‘기장실’이 차차 변음돼 ‘지장실’이 된 마을이다.

이곳에서 언제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전엔 마을 사람들과 이웃사람들이 각각 한패로 나뉘어 하는 놀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요즘도 매년 거르지 않고 행해지는 줄다리기는 주민만이 참여하는 축소된 형태로 진행된다.

준비과정은 정월보름 아침에 짚을 두어단씩 들고 나와 길고 두껍게 줄을 엮기 시작한다. 암줄과 숫줄의 길이는 약 10여m 정도이며 용두에서 꼬리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대낮 서너시가 돼서야 끝나면 이어 지신밟기가 시작된다. 주민들로 구성된 두레 풍물패가 돌며 집집이 돌며 액맥이 우물고사를 지낸다. 두래패를 맞는 주인은 우물앞에 간단한 제물과 대접상을 차려놓으면 상쇠를 잡은 소리꾼이 가락에 얹어 고사본 주문을 풀기 시작한다.

“국태민안 법률전 시화연풍 돌아든다. 태조대왕 등극시에 봉황눌러 대궐짓고 대궐눌러 육조마대 왕심이 청룡이냐. 이댁가정을 접어드니 이댁저댁 다버리고 박씨댁에 고사 한 번을 지내보고 앞 강도 12강이냐, 뒷강도 12강이냐, 12제국의 열두나라…”로 이어진다. 지신밟기가 끝날 즈음이면 해는 저물어 어느덧 보름달이 덩그러니 떠오르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줄다리기는 이때부터 시작되는데, 요즘은 마을까지 들어오는 노선버스가 시내 나갔던 주민들과 외지에 나가 살고 있는 주민들을 내려놓는 오후 8시경이 된다. 암·수 용줄을 당기기에 앞서 두레패와 주민이 흥겹게 한판을 놀고 난 후 암수로 구분된 줄 용두에는 각각 대장이 올라탄 채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되는데 특이한 것은 암줄에 여장을 한 남자가 올라탄다는 것이다. 이 때 숫줄에 탄 사람이 “00년을 맞이하여 대풍을 이루고 무사태평을 기원합니다”라고 한 후 이어 “남녀가 구별하여 줄을 당기니 여자와 16세 이하 남자는 여자편으로 가고, 16세 이상은 남자편으로 가시오.”하고 명령한다.

용두에 각편을 대표하는 어른이 올라탄다는 것과 작대기를 꽂아 의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다른 곳의 줄다리기와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몇차례 앞 뒤로 얼르다가 내려놓고 용줄을 결합시키게 되며 이어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지금까지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전승돼 오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해도 줄다리기를 쉰적이 없다. 어느 해인가는 줄다리기를 걸렀다가 동네에 괴질이 번져 그해 여름, 다급히 줄다리기를 한 적도 있다 한다.

□남사면 산정동 줄다리기□

산정동 줄다리기는 그 규모나 본래모습으로 보존돼 온 전통성 등에 비춰 용인을 대표할 만한 줄다리기임에 틀림없다. 이 마을의 줄다리기는 주민간 단합을 꾀하는 대동의 의미뿐만 아니라 당제(堂祭)와 같는 주술적 의미가 강한 엄숙함이 배어있는 풍습이다.

정확히 시작된 연대는 알수 없으나 족히 300년은 됐을 것이란 추측이다. 전염병이 나돌던 당시 이 마을은 유독 그 피해가 심했다. 주민들은 마을의 액운을 물리치고 동시에 온 마을의 단합을 꾀하고자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풍악소리에 정신을 모아내고 줄 하나에 몸이 따라감으로써 휩쓸고간 병마를 딛고 일어나 새로운 힘을 모아내는 의식으로서 말이다. 정월 대보름을 기해 치러지는 이 행사는 기후가 불순하거나 마을에 흉사가 있으면 다른 날로 연기된다. 한국동란 직후에 열병이 나돌아 못자리를 마친 4월이 돼서야 행해지기도 했단다.

줄다리기 줄은 암줄과 숫줄로 나뉜다. 지름이 60cm가 넘고 길이만도 수십길이 넘는 거대한 줄을 주민들은 두패로 나뉘어 짊어지고 나온다. 암줄은 여자들과 미혼남자들이 메고 숫줄은 기혼남자들이 둘러맨다. 낭대(깃대)를 앞세우고 암줄은 북쪽으로 마을을 돌아 남쪽으로 내려가고 숫줄은 남쪽을 돌아 동북간으로 머리를 둔다.

줄다리기에 앞서 초례청 인사를 하듯이 숫줄은 한번 반 앞으로 숙이고 암줄은 두 번반을 앞으로 숙인다. 그런 다음 앞을 맞대어 두어번을 얼르고 결합시켜 중간에 지렛목을 낀다. 두레를 놀며 한바탕 주위를 돈 다음 낭대를 가운데 기점에 놓고 징을 세 번 울리면 줄다리기는 시작된다.

지네발처럼 옆으로 묶은 줄을 서로 당기는데 결과는 은근히 정해져 있다. 숫줄을 잡은 쪽이 한 번 이기고 암줄을 잡은 여자편이 두 번 이긴다. 실제 숫적으로 열세인 기혼남자들이 질 수 밖에 없기도 하다. 어느쪽이 이기는가에 따라 그 해의 풍년을 점치기도 하는데 숫줄이 이기면 쌀 풍년이고 암줄이 이기면 보리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보리흉년이 더 무서웠던 옛 시절이고 자손의 번성을 원했던 당시엔 여자편이 이기도록 했다는 것이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용당으로 옮겨놓는데 용당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줄을 당기거나 밀기도 해 도랑으로 빠지거나 담장이 부서지는 경우도 있다. 이는 재미와 함께 새해 농사를 준비하는 농군들이 겨우내 약해졌던 체력을 단련하는 의미도 있다.

□양지면 한터 동홰놀이□

동홰놀이는 달집(동홰)을 불태우면서 풍요와 다산을 뜻하는 정월 첫보름의 달맞이와 함께 가솔의 무병장수, 부귀다남, 더 나아가서는 국태민안과 태평세속에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를 함축하고 있다. 이 놀이는 대동제의 성격으로부터 출발, 열나흩날 산신제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보름날 동홰놀이로 이어진다.

동홰놀이는 다시 길놀이, 고사반, 줄다리기, 뒷풀이로 구성되는 바,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가 자기 나이수대로 매듭을 지은 횃대(햇불)을 태우면서 마을과 가정의 안녕과 태평, 다산과 풍요를 발원하고 불운, 병마, 액운을 불태움으로서 매년 거듭나는 새로운 삶을 추구했다는 점, 그리고 이웃과의 갈등이나 가정의 불화, 개인적인 감정까지도 해소하고 누적된 고뇌와 번민 등의 부담을 떨쳐 버린다는 의식적인 행사의 성격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동홰는 글자그대로 온 마을을 비출 수 있는 규모의 횃불로서 그 크기는 높이가 30여척(8∼9m), 직경이 15∼16척(3∼4m)에 이르렀으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상층부에 점화하면 나무단이 성화처럼 밤새도록 타올라 온 마을을 비추었다 한다.

동홰의 화광이 충천하면 마을대표의 고사반에 이어 사람들 각자가 추구하는 모든 소망을 빈다. 이때 달을 향해 4배한 후 각자 가져온 횃대에 불을 붙여 상하로 흔들면서 “달님절아” “달님절아”를 외치며 소원성취를 기원한다. 동홰와 달님에게 소원성취를 비는 놀이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대개 두 갈래로 나뉘어 암수 용줄(다림줄)을 운반해 오고 두레가 이들을 운반해 마을을 한 바퀴 돈 다음 암줄에는 15세 이하의 사내와 부녀자들이, 숫줄에는 성인 남자들이 편을 달라 줄을 당기는데 대개 남자쪽이 이기게 되므로 여자측에서는 줄 끝에 말뚝을 박는다. 그래도 끌려가게 되면 많은 인원이 여자쪽에 가세해 결국 여자가 이기도록 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동홰를 중심으로 흥겨운 유희로 뒷풀이를 해 대미를 장식한다.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