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추석명절을 맞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는 고향이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의 정서적 모태가 된다는 고향. 가난 속에 허덕이며 고통스런 추억밖에 없을 법한 사람에게도 고향은 늘 그리워하고 베풀고 싶었던 대상이었다. 여기 평생 향토사랑의 외길을 살다 간 출향인을 지역인물로 발굴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미 고인이 된 그는 ‘기남이 고개’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고 박기남(1913~1985)씨다. -편집자 주-


2000년 8월 28일 오전. 양지면에서 정수리와 대대리로 넘어가는 아시아나 골프장 내 고개길에 인근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기일은 아니지만 제사상이 차려지고 한 기념비 앞에 노인으로부터 동네 아낙과 청년에 이르기까지 절을 올리며 누군가를 회고했다.

“돈만 있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지. 그 이는 사업이 기울어 어려웠을 때도 고향과 후학을 위한 일이면 발 벗고 나섰어. 평생 고향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는 생각만 하다 눈을 감았지”정수리 마을 이장을 오래도록 보았다는 고병훈(70 )씨의 얘기에 노인들은 공감을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난 그 분이 무슨 일을 한 분인지 얘기만 들었지 누군지도 잘 몰라요. 하지만 우리 고장에 그런 분이 계셨다는 게 자랑스럽지요” 열심히 어른들 수발을 들고 있던 주북리 한 청년의 말이다. 세상을 뜬지 십 수년이 지났지만 주민들이 모여 이처럼 정성껏 기리고 있는 이는 고 박기남씨다.

“어린 박기남(朴基男)은 이곳 외가닥 고개길을 넘어 다니다가 서기 1960년 이제 참의 사람이 된 큰 박기남은 이 한길을 닦다. 고개를 넘는 이들이 가남이 고개라고 부르며 그의 갸륵한 뜻을 생각한다. 고향 사람들과 양우회가 이 일을 기념하여 여기 고개 위에 이 비석을 세우다. 1960년 10월 6일.”

‘기남이 고개’의 주인공 박기남이 태어난 곳은 양지면 정수리 203번지. 용인의 동북방향 접경이자 오지마을이다. 그의 집은 척박하고 가난한 이곳에서도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커다란 산등성이를 넘어 양지초등학교(당시 양지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그는 기울어진 가세로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4년만에 중단하고 낯선 서울 길로 떠난다.

일제치하였던 당시론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이 일본인의 점원노릇이었다. 그는 국내에선 생산되지 않던 유리제품을 판매하는 곳에서 일 했는데 1945년 해방은 그에게 커다란 기회를 가져다준다. 성실히 일했던 기남에게 일본인 사장이 사업을 맡기고 허겁지겁 일본으로 떠난 것. 그는 ‘협진유리’라는 회사를 세워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돈을 모으면 모을수록 고향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한은 깊어갔다. 초등학교 졸업도 못하고 돈벌이에 나서야 했을 정도로 가난에 찌든 정수리. 그리고 양지초교로 넘어 다니던 험하고 구불구불한 고갯길….1931년 28명의 졸업생 중에는 끼지도 못했던 그는 입학 할 당시 교사로 쓰이던 향교 대성전 건물도 아른거렸다. 노천강습소에서 공부를 하다 3학년이 되어서야 평창제사장(강습소) 건물을 빌려서 교실을 썼던 기억과 함께.

“언젠가는 내가 이 고생이 고향에서 대물림되지 않도록 무언가 해야지.” 그는 양지초교를 같이 다니던 19회를 중심으로 외지에 나가 그래도 성공(?)한 친구들과 모여 친목회를 구성했다. 당시 회원은 김복규 삼화페인트(주)회장, 박기철 성우실업 회장, 안석준 천일사 대표, 송재별(작고), 이재구 전 조흥은행 상무, 심우일 그리고 박기남 협진유리 회장이었다.

양우회가 모교를 위해 보인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오르간(풍금) 기증, 재봉틀, 운동기구 등 여러 가지 학습용품 외 1960년도에는 2개 교실 준공, 62년엔 국기 게양대 건립, 1967∼68년도 교사수리 및 자제 지원(시멘트, 페인트, 기술자 외) 등 어려운 학교 환경을 개선하고 후배학생들이 보다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온갖 지원을 기울였다. 모교 운동회 때마다 상품을 지원하기를 약 30년간이나 계속해 어린 동심의 후배들 마음을 마냥 즐겁게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박기남의 관심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첩첩산중에 하늘만 훤하게 뚫린 정수리 마을. 고향에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마을에서 가장 왕래가 많고 대로로 통하는 정수(양지)고개를 뚫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김량장을 나가든, 행정사무를 처리하러 면을 나가든, 특히 어린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는 것도 양지였기 때문이다.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펴서 왕래하기에 편하도록 새로 뚫는 역사적인 정수고개 사업을 본격 시작한 것은 1960년. 지성룡씨가 현장에서 그를 대행해 공사가 시작됐다. 서너달 동안 중장비를 들여 길을 닦아 나갔다.“불도저를 동원해 샛길을 만드는데 밤에는 중장비 부품을 몰래 빼 갈까봐 주민들이 교대로 보초를 서기도 했어.”
고병훈씨의 회고다. 헌신적인 박기남과 주민들의 적극적인 합심으로 약 4km, 십리길이 새로 뚫렸다. ‘양지 3북’으로 통칭되던 정수리·대대리·주북리로 통하는 길이 차마가 다니는 길로 만들어진 것이다.

박기남이 고향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가난했던 고향마을 정수리에 쌀 20가마를 기증해 어려운 주민들이 ‘장래쌀’로 사용토록 했다. 당시 이자가 쌀 한 가마니에 다섯 말이나 하던 시절, 주민들은 2말만 내고 쓸 수 있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당장
먹고살기 위해 비싼 이자 쌀을 주고 빌려다 먹는 악순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박기남이었다.

이 쌀은 결국 87가마까지 늘어나 1980년 마을회관을 짓는데 사용됐다. 정부가 철근 1톤, 시멘트 300포를 지원해 줘 지은 현재 마을회관도 결국은 박기남의 후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우상표 기자 spwoo21@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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