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에도 쉰들러가 있다. 쉰들러가 2차대전 당시 독일에 의해 처형될 운명에 놓였던 유태인들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라면 그는 해방 후 한국전쟁시기까지 극한 이데올로기 대립과정에서 좌우익간의 골육상쟁을 한 지역에서 막아낸 사람이다.

쉰들러가 자신이 구한 유태인 1200명의 이름을 적은 명단을 남겨 ‘쉰들러 리스트’란 제목으로 일생이 영화화되고 세상에 그 명성을 날렸다면 그는 평생 이름없는 촌부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맹두섭(90)옹.1911년 기흥읍 상미 마을에서 태어난 그가 해방을 맞은 것은 30대 중반의 나이였다. 세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면서 치열한 이데올로기 경쟁을 벌일 당시 한반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며 용인의 한 면소재지에 불과했던 신갈지역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순 없었
다.

극한 좌·우익 대립이 격화된 해방정국에서 치안은 사실상 공백상태였다. 그때 가장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것은 남로당 계열의 인민위원회. 그러나 당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비춰 보면 사상과 노선에 따른 특정세력의 하부조직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상미 출신으로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 독립촉성회에 관여했던 이종영이 귀향해 이 상황을 보고 “좌익조직인 인민위원회가 뭐냐”고 호통을 치자 얼른 「기흥 면민회」로 명칭을 바꾸었던 것도 봐도 그렇다.

아무튼 여러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날로 이념적 대립이 격화되자 그는 일본 징용에서 돌아 온 젊은이들을 포함, 20세∼40세의 젊은이들을 규합해 청년 자치조직을 결성했다. 여기엔 계기가 있었다. 당시 마을 유지였던 이희덕(국민회 기흥회장, 삼흥 한의원 원장)집에 도둑이 들어 돈을 강탈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다. 마을 치안은 주민들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좌익세력에 대항하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된 것.

당시 천 수백호에 그쳤던 신갈면의 규모에 비춰 대동청년회 단원이 많게는 960명에 달했던 것으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감찰대를 핵심으로 하는 대동청년단 기흥면 분단장을 맡았다. 그가 비록 특정 이념과 세력을 기반으로 한 청년조직의 지역 책임자였지만 대립의 완충역할로 빛을 발한 것은 6.25가 나던 1950년이다.

그해 7월 4일쯤 국군이 열세에 몰려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 경찰서 지소주임이 좌익활동자 2명을 데리고 와서 처리방법을 의논했다. 그는 단호하게 ‘살생은 안된다’고 말했다. “그를 죽이면 우리가 나간 뒤 몇 배를 죽일 것이다. 또 우리가 들어오면 가만 있겠는가. 피바다가 될 것이다.” 결국 그냥 풀어주었고 전쟁 중 인민기와 태극기가 번갈아 휘날렸지만 지역민간 불행한 복수극이 벌어지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30만원의 현상금까지 걸려 어쩔 수 없이 충남 공주의 외진 마을에 숨어 지내다 수복 후 귀향해보니 그가 없는 동안 대동청년단장의 집이 무사할 리 없었다. 반대편에 섰던 이들에 의해 총질과 함께 재산을 빼앗아갔다. 하지만 세상은 다시 바뀌었고 약탈자는 청년방위대원에 의해 붙잡혀왔다. 맹단장이 물었다. “우리집에 한 짓은 어쩔 수 없어 그랬을 것이다. 당신이 잘 한 것이 있으면 말해봐라.” 그는 경찰 7명을 숨겨준 적이 있다고 했다.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두말 없이 풀어주라고 일렀다.

이같은 일은 대동청년단 간부가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이들에게 유인돼 살해를 당하고 이를 보복하지고 주장하던 대원들에게도 똑같은 이유로 보복전을 막고 법대로 처리하도록 유도했다. 마치 광풍처럼 지배세력들의 이념대립에 휩쓸려 일반민들이 서로 이웃을 죽이던 시절, 그가 생각한 것은 단 한가지였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는 것.

“그들이 했던 행위는 비정상적인 시대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지. 우리를 원수로 생각하고 저지른 행위가 아니었거든”한번은 이런 일도 있다.당시 좌익 활동자로 유명했던 인근 마을 사람이 어디 숨어있는지를 알았다. 험악했던 시절인지라 본인은 물론 숨겨준 사람도 무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청년단원이었던 은닉제공자에게 은밀히 말하길 “그의 소재를 알려달라고 말하지 않겠다. 자네를 혈육을 고발하도록 하는 못된 짓을 강요할 순 없다. 다만 생각을 바꿔달라고 가서 권하라.”벌벌 떨던 그가 맹단장의 예상 밖의 태도에 크게 고마워한 것은 당연하다. 사상적 대립과 치안혼란기. 그에겐 힘이 있었다. 그러나 절대 휘두르질 않았다. 당시 일본인들이 두고 간 자산에 대해 기흥면민회 이사로서 송근호와 함께 일인 자작농지 분배사업 책임을 맡았다.

일본 징용자 출신에겐 600평∼700평을 고루 나눠주는 등 원칙에서 한치도 벗어나질 않았다.어린 6살 때 아버지 맹이술이 만주로 넘어가 조모와 어머니는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하고 그 역시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그 탓으로 강습소와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농촌 지도생이 돼 소작을 할 정도로 넉넉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주위에서조차 “당연히 당신몫도 가져야 한다”는 권고를 단호하게 물리쳤다. 또 일제 적산인 3000여평의 과수원 땅을 학교부지로 사용토록 주선해 오늘날 신갈초교의 너른교정을 마련하는데 밑받침이 됐다. 후일 2대 면의원을 지내기도 하고 현재 향교와 심곡서원 고문을 맡고 있는 맹두섭옹.

그는 상대를 ‘역지사지’로 바라보는 화해와 포용의 정신으로 상쟁과 살육을 막은 한국판 쉰들러 이기도 했지만 또 하나의 정신이 그의 삶을 곧게 이끌었다. 마음을 반드시 바로 세워 흔들림 없이 자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심필정립(心必正立)’이다. 최근 화해와 평화를 기반으로 통일로 향하는 물꼬를 텄던 것이 바로 맹옹의 이러한 두가지 정신이 살아있음이리라.

나라도 그렇거니와 요즘 지역사회도 지역간, 정치집단간, 세대간, 이익집단간 소소한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이럴 때 일수록 지역의 큰 어른, 맹옹의 삶과 철학을 따라 배우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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