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기획특집) 되돌아 본 용인의 옛 모습


55번째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일제하에서 우리민족의 생활사를 조명해보며 그동안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행한 비인륜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는 이미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잘 알고 있다. 그것을 토대로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일제의 만행을 당시의 증언이나 매스컴을 통해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다시는 우리 민족은 물론 지구상에 어느 민족도 국가도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식민지시대의 선대의 아픈 마음을 되새기면서 돌아오는 광복절을 새로운 마음에서 맞이하고자 한다.

어느 나라든 식민지가 되면 서러움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민심이 분열되어 지배민족에 순응하고 그들에게 협조하고 아부하고 기회에 편승하여 그들의 노예가 되는 사람도 많았다. 또한 많은 국민은 침묵하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기회주의 부류도 있었다. 또 국민으로서 조국의 주권을 찾으려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생사를 넘나들며 항쟁한 분들의 숭고한 이념도 우리는 가슴깊이 새기며 뜨거운 마음으로 경의해 맞이한다.

일제시대의 용인은 수여선 증기열차의 통행으로 타군보다는 일찍 신문명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수원 이천 광주 안성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용인은 발전할 수 있는 비전이 있었으며 결국엔 양지 구성 기흥 등에 비해 늦게 형성된 도시가 빠른 기간에 성장하고 인구가 급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용인이 중심도시로 일어서며 양지나 기흥 구성에 없는 일본인소학교가 생겼으며 이것이 일본인에게 조선에서의 생활이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삶에 조건을 형성해 주어 용인에 일본인이 많이 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그러면서도 일본인이 용인에 많이 살게된 진짜 원인은 용인에는 용인군청 경찰서 세무서 전매국 신사 등등 신도시건설로 일본인이 용인의 요지에 쉽게 정착할 수 있는 조건이 용인시 발전의 요인이었으며 그 결과 일본인이 생활하는데 어느 곳보다 좋은 입지에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었다.

용인의 산하는 지금까지 큰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용인의 도로는 그때 형성되어 무수히 많은 길이 생겨나 그 길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되었다.
해방 54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의 부끄러운 과거역사를 알아보고 그 시절에 우리의 고향은 어떤 모습에서 어떤 환경속에서 살아 왔나를 한번 되새기고자 한다. 그럼 용인에는 관공소와 기타 시설물은 어디에 있었을까. 용인에는 이런 곳이 있었다.

1.김량장공립보통학교: 1915년 11월5일 23명의 학생으로 개교된 용인초등학교의 전신인 학교는 우리 조선사람만 다니는 소학교였다.
1936년 용인공립보통학교/1938년 김량공립심상소학교/1941년 김량공립국민학교/1946년 용인공립국민학교/1951년 용인국민학교/1996년 용인초등학교로 학교이름이 변경 되었으며 초창기에는 4년제 학교로 시작하여 후에 6년제 학교로 바뀌었다. 현재 용인초등학교 북쪽면이며 운동장은 당시 논이었다.

2.용인공립심상소학교, 용인공립심상고등학교: 일본인소학교가 있었으며 보통학교를 졸업하면 다닐 수 있는 2년제 고등학교(현 중학교)가 같이 있었다.(고등학교에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학생도 입학가능) 현재 통신공사 자리로 일본인 사택도 있었다.

3.한약방: 해방 3-4년전 삼화한의원을 개설했음.(고 전두식의원) 현재 북구에 옛집이 있다.

4.용인장로교회: 1905년 7월 용인최초 교회로 용인교회가 문을 열었다. 현재 용인장로교회의 전신이다. 현재 북구 산다랭이 교회로 오르던 계단만 남아있고 교회자리는 밭으로 변했다.

5.술집: 옛부터 금학교 부근 술집촌을 술막으로 불렀다. 지금 방앗간 자리 기와집에 영춘옥 주막이 있었다. 현재 대성떡방앗간 안채.

6.기차역: 수여선(일명 경동선)은 1930년에 국철이 아닌 개인철로 조선경동철도회사가 건설 1931년 12월에 개통된 협궤(레일거리가 76.2 CM)열차가 운행되었다. 현재 대흥빌딩에서 LG마트 홍성갈비 등 넓은 부지였다.

7.공장: 이정용(선반) 고승덕(엔진) 노승배(자동차) 최정환(차량하체) 용인최초로 선반을 갖추고 공업사를 열었다. 현재 박필동씨 건물.(1946년 개업)

8.곡물검사소: 1935년 5월 용인출장소 개소. 현재 시청옆 현존하는 건물.

9.마루보시: 일본인이 경영하는 운수회사.(대한통운의 전신) 현재 축협판매장자리에 큰 창고도 있었다.

10.요정: 태화관으로 일류요리집을 겸한 곳으로 대문 셋을 통해야 하는 호화 요정. 현재 새마을금고 동쪽 제일한의원자리.

11.경동철도회사부지: 큰 운동장이 2면으로 축구 야구 등 시합을 했다. 각 군대항축구대회인 근기대회(近畿大會)를 열어 용인 이천 여주
광주 수원 안성 평택 7개팀이 대회를 열었다. 현재 용인타워 신축지에서 실개천까지.(현재 복개돼 있음)

12.마로니: 일본인이 경영하는 운수회사. 현재 용한약국자리.

13.양조장: 막걸리를 주조하는 지금의 해동양조장이다. 현재 한빛은행자리.

14.목욕탕: 40-50명 정도가 목욕할 수 있는 곳으로 물탕을 가운데 두고 남·여탕 양쪽에서 물을 사용했으며 바가지는 쌀되 모양이었다. 현재 용인문화원 자리.

15.정미소: 청한상가 북쪽.

16.제재소: 정미소 뒤에 있었다.

17.주점: 안동관은 일반 술집이다. 현재 사거리 통닭집.

18.잡화점: 원인상점으로 그 당시는 매우 큰 마켓으로 용인에서는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식료품, 포목점, 시멘트, 석유, 담배 등을 판매했다. 현재 시장 송재진씨 건물 크로바슈퍼.

19.제과점: 부채 과자, 사탕 빵도 직접 만들었음. 현재 성형외과 자리 박영진씨 소유의 땅.

20.한옥: 남구 경남유치원자리. 남찬봉씨댁은 대중소 문이 있던 큰 한옥집.

21.51상: 한국인이 경영하는 운수회사.(천정덕씨) 현재 용인경로당 동쪽.

22.여관: 객실이 10개정도 있었다. 현재 사거리 순금당 자리

23.버스정류장: 중앙여객 버스터미널로 휘발유를 취급하는 가게가 같이 있었음. 현재 사거리 순금당 서쪽 우체국 사이.

24.의용소방대: 의용소방대가 대원도 많았고 활동도 많이 했다. 조빈행옹, 남상학옹 등이 소방대장을 했다. 현재 회성철물자리.(전 한전
자리)

25.우시장: 800평 정도에 큰 장이 열렸다. 현재 마평리 공설운동장 입구 동남아파트자리.

26.세무서: 1934년 5월 용인세무서가 현 용인시청 자리에 개소했다. 용인 광주 천호동 성남 강남까지 용인세무서 관할이었다. 현재 용인
시청 자리.

27.전매소: 전매국 하급기관으로 용인군만 관리하는 전매소. 현재 산림조합자리.

28.전매국: 여러군의 전매소를 관리하던 곳으로 용인 수원 광주 이천 안성의 담배, 인삼, 소금을 취급했으며 후에 수원전매청의 전신이다. 현재 산림조합부터 대성광고기획까지.

29.전매소 국장 소장관사: 현 시장관사 북쪽 시멘트 뚝위에 있었던 기와집.

30.세무서장관사: 현 용인시장관사.

31.도살장: 세무서 뒤에 있다. 후에는 김량천 공설운동장 개천건너 뚝에 있었다. 현재 성복측량자리.

32.면사무소: 현재 한빛은행 남쪽 용인초등학교 앞길로 학교와 마주보고 있었다.

33.씨름장 활터: 김량장군 묘터에 조성한 씨름장(스모). 한국씨름은 우시장 근처에서 단오나 백중때 소를 경품으로 대회가 열렸다. 현재 중앙감리교회자리. 활터는 스모장 동편에서 북쪽을 향해 쏘았다.

34.신사, 관측소: 씨름장에서 노고봉 쪽으로 단을 만들어 일왕에게 참배하던 곳. 현재 보건소자리. 관측소는 기후(비 바람 눈 등)를 측정하는 곳이 있었다. 신사 앞 동북쪽에 있었다.

35.배나무 과수원: 용인의 원래 농지에 세운 도시라 대부분이 논과 밭 그리고 과수원이 있었다. 현재 인삼조합 한전 중앙동.

36.용인금륭조합: 1913년 8월16일 용수농계조합의 금융회사가 문을 열었다. 현재 농협시지부.

37.경찰서: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두고 조선주재 일본헌병사령관이 경찰총장이 되어 전국의 헌병경찰을 총지휘 하였으며 용인은 1914년
헌병경찰제 실시로 면사무소 근처에 주둔하며 식민통치를 하다 1919년 용인경찰서로 개칭하여 현 용인경찰서 자리로 이사했다. 현재 용
인경찰서 자리.

38.경찰서장 관사: 경찰서 뒤편 언덕에 군수관사와 담을 같이해 일본식 기와집에 울타리가 높은 관사를 지었다. 현존한다.

39.군수관사: 서장관사와 접해 남쪽에 지어진 군수관사도 서장관사와 비슷하게 지었으나 지금은 거성빌라로 변했다.

40.군청, 교육청: 1895년 4월 용인현에서 용인군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14년 양지군과 합하여 양지군까지 관할하는 군으로 커졌다.
교육청업무는 당시 군청에 속한 학무과에서 교육청업무를 보았다. 현재 김정란산부인과 남쪽 담을 쌓은 집.

41.토관: 시멘트 토관을 만들던 공장(조병천옹). 현재 제일은행 맞은편 동아빌딩.

42.병원: 용인최초의 병원이 어병원이 있었다. 어공의 의사의 성을 딴 병원이지만 공의병원으로 더 알려졌다. 현재 재성빌딩자리.

43.안식일교회: 현재 마평리 제일교회 맞은편에 약방 뒷집.

44.정구장: 당시 용인전매국에서 소금을 관리하던 때라 바닥에 소금을 많이 뿌려 정구장 면이 매우 좋았다. 전매국소유. 현재 제일은행 뒤 주차장.

45.신작로: 1908년 수원 용인 이천국도(현42번) 건설 착공하여 최초 신작로가 생겼다.

46.법원: 용인면 서쪽 전등기소 자리에 1915년 8월23일 경성지법 김량출장소를 김량장 300-9번지에 신축건물을 짓고 등기업무 개시했다. 현재 옹고집 국수집.

47.우체국: 1911년 9월16일 용인우편소를 현 우체국자리에서 개소하여 1934년 전화교환국 업무 개시했다. 현재 우체국.

48.자전차포: 자전거가 많았지만 부자나 탈 수 있었다. 현재 경찰서 앞 성형외과 서쪽.

49.호떡집: 중국사람이 경영하던 떡집. 현재 용성관광자리.

50.이발소: 당시는 머리를 기르는 사람이 적었고 어린이는 삭발을 하였으므로 동리에 이발기계(바리깡)가 있었다. 현재 사거리(홍갑철옹의 이발소) 김정문알로에자리.

51.중국집: 현재 사거리 경찰서쪽 2층에 있었다.

52.약국: 동화약국이 있었다. 현재 제일약국자리.

53.한·양의: 화춘병원에서 한방과 양방을 다 치료했다.(김병선의원) 현재 경찰서 앞 왕국회관자리.

54.마초저장소: 건초저장소. 현재 축협 뒤 인태운씨집터.

55.송진기름공장: 대동화전쟁 말기 기름부족으로 소나무 광술로 기름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현재 용인문예회관 자리.

56.어물전: 용인에도 생선가게가 여러 곳 있었다. 현재 국민은행자리에 송인환씨 어물전이 있었다.

57.김량철교: 수여선철도는 김량천 위로 긴 철교를 놓았다. 현재 술막교 끝부터 마평리 공설운동장 남쪽까지 철교였다.

58.45번국도 위로 철로가 지나갔다.

59.용인초등학교 앞에 유인철도 건널목이 있었다. 그외에 사거리 현대열쇠 자리에 미곡상점(쌀가게) 김량천교옆 별표페인트자리에 정육점(김사달) 거성빌딩앞 고물상이 있었으며 전매국 앞뒤로 벗나무를 심어 봄에는 벗꽃이 장관을 이뤘다.특히 용인은 벌목장이 많아 목재반출이 많았고 목탄차가 많이다녀 현 용인장로교회자리에 림삼조합에서 목재를 관리했다. 돌아다 보면 54년전에 있었던 일본식 건물은 경찰서장 관사로 외형은 그대로 남아있다.

/글 이제학(용인의 산수이야기 저자)
/사진제공 장성규(용인라이프 대표)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