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는 이웅희 전 국회의원과 본지 편집일정상 여의치 않아 25일(목)밤 오후 8시 30분부터 9시50분까지 약 80분간 전화상으로 이루어
졌다. 이의원은 이 자리가 고별 인터뷰인 점을 고려했음인지 평소 노련한(?) 답변과는 달리 허심탄회하게 평소의 생각을 털어놨다. 특히
국회 고스톱사건에 대해서도 “고스톱을 친 바 있다”고 처음 밝혔다. 인터뷰 말미에는 재임중 불거진 서북부 난개발 문제가 마음에 걸렸
던지 “안타깝고 걱정스럽다”며 국회에서 자신이 무계획적 개발에 대해 벌였던 반대활동을 소개하기도 했다.

-건강은 어떠신지
“우리나이로 올해 71세다. 그 나이치고는 적절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하시는 운동은
“운동은 골프를 좋아했는데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는 거의 못하고 중단했다. 요즘은 아침일찍 일어나 근처 야산에 등산을 한다”

-후진을 위해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지역정치의 모범적 선례를 남기게 됐다는 평가다. 70대 노정객이 많은 한국정치 상황에서 정계은퇴
를 결심하게 된 배경은
“정계를 은퇴한 이유 중 하나는 나는 이미 세 번 국회의원을 하면서 용인을 대표했다. 나이 70이 됐고 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나라와 용인
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싶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정치현실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왔다는 점이다. 현실정치는 일반국
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인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치에 계속 몸담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런 가운데서도 3선까지 하셨지 않나
“내가 언론계에만 30년을 있었다. 오랜 정치부 기자를 하면서 주욱 느껴온 것이 뭐냐하면 나라의 기본틀을 세우고 근대화하기 위해 존재
하는 정치와 선거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어쩌다 국회에 나와 보니 13대때는 ‘역시’더라. 그만두지 못한 것이 14대때 출마여부를 고민
하고 있는데 지역에서 정갱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더라. 그 사람들에게 질 수 없어 나왔다. 15때도 뺄 수 없어 했다. 12년 동
안 국회의원 하면서 시민들 위해 애를 많이 썼는데 최선을 다했다고는 스스로 자부하기 어렵다.”

-보람은 없었나
“글쎄. 정치 12년 하면서 보람느끼는 것은 별로 없었다. 장관도 했고, 정치부 기자만 20년 했고, 문화방송 사장 등을 했는데... 얼마나 바
르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후회와 자책감도 없지 않다.”

-5공정권 참여와도 관계가 있나.
“있다. 옛날 기자시절 국회를 출입하면서 보면 그래도 당시는 정치의 본틀을 잡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보안법 파동 등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원칙을 지키려고 애를 쓰다가 자유당 말기부터 멍들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 돈과 불법으로 여당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
날까지 그렇다.”

-16대 선거도 역시 그렇게 본다는 얘기인 것으로 이해되는데
“글쎄, 직접 논평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국민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5공정권의 핵심에 대해 쿠데타 세력으로 역사적, 법적 심판을 받고 있는데 당시 정권에 합류한 것은 자신의 정치철학과 일치했었나.
“동기나 경위설명은 못하겠고 들어간 마당에 어떻게든 민주화 방향으로 가도록 애썼다. 예를 들면 한번은 아침에 회의가 있어 나갔더니
정무수석, 비서실장, 보안사령관 등이 나와 있더라. 의제가 언론 통폐합이었다. 보안사에서 브리핑을 하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그만하라
고 하더니 그 계획에 대한 의견을 나한테 물었다. 내가 그랬다. 일방적이고 통폐합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다른 몇 사람도 공보수석 말이
맞다고 했는데 나중에 결과을 보니 야단났더라. 전대통령에게 경위를 물으니 묵묵부답이었다.

-언론생활과 관련해선 이승만대통령 해외망명에 대한 특종이 유명한데 그 당시를 다시 한번 회고해 달라.
“4.19로 이대통령이 하야 이후 해외망명을 할 것이라는 징후는 여러군데서 느꼈다. 사저인 이화장과 미대사관에서 며칠밤을 샌 후 메카
나기 미대사에게 이 대통령 신상에 대해 물으니 ‘노코맨트’였다. 그래서 직감이 들어 ‘이박사 곧 망명가능성’이란 기사를 1면 톱으로 썼
다. 실제 빠져 나가는 장면은 타 신문에서 썼다.”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 후계구도와 관련 이의원님이 ‘약속을 어겼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사실관계는 어떠했나
“김정길 위원장과 관련해선 도대체 말이 안되고, 김학규 위원장 경우도 서울에서 만나 15대는 내가 하고 16대때부터 당신이 하는게 어떠
냐 하니까 말을 안하더라. 그 후의 과정은 잘 알지 않는가. 말미에 김학규씨를 밀어 준 것은 정치적 의리 때문이었다.”

-짓궂은 질문이다. 국회에서 당시 여당의원들이 모여 고스톱을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할건가.
“사실 고스톱을 했다. 하지만 보도된 것처럼 내방에서 한 것도, 심하게 한적은 없다. 다만 상황이해를 위해 얘기하자면 회기중 안건처리
에 대한 대립으로 정회가 자주 되곤해서 어느땐 오전부터 밤 12시까지 대기해야 하는 상황도 비일비재하다. 그럴 때 했다. 아마 여야 구
분 없이 절반정도는 했다.”

-정계원로로서 한국정치의 문제점과 개선지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
“선거가 깨끗해야 한다. 영국도 옛날엔 엉망이었다. 1883년 영국 수상 글레드스톤이 2년동안 선거법을 개정해 엄청난 저항을 각오해 가
면서 10년동안 싸웠다. 그런 다음 바뀌었다. 우리나라 선거법이 바로 그것을 본뜬 것이다. 정치와 정치인이 기본적인 문제다. 그것이 뜯
어 고쳐져야 관료사회도 맑아지고 정경유착도 사라진다.”

-용인지역 출신 2명의 후임 국회의원들께 한 말씀 드린다면.
“딱 한마디만 한다. 정치근대화 촉진을 위해 노력해달라.”

-지방지치시대를 맞이해 지자체장과 국회의원의 역할과 위상변화가 있다. 상호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국회의원은 나라정치의 근대화에 핵심역할을 해야하고 지역발전은 시장과 시의원들이 해야 하는데 점점 더 복잡다난한 정치구조로 돼
가고 있다.”

-회고록을 쓰고 있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 진척됐으며 언제 세상에 내놓을 예정인가
“지난 해 말부터 시작했다. 이미 당시에 80%이상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달 동안 쓰다보니 체중이 줄고 해
서 병원에 입원해 보니 과다한 정력소모를 하지말라고 하더라. 그 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노후를 고향에서 보낼 계획은 없으신지
“서울에 연립주택이 있긴 하지만 아버지가 과거 부자이셔서 지금도 고향에 땅이 좀 있다. 본래 고향에 내려올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
즘 사정이 곤란해 졌다. 신상문제가 아니고 경제적인 문제다. 그리고 이 참에 한 마디만 해두고 싶다. 수지, 신갈 아파트 문제에 대해 국
회에 있는 동안 이래선 안된다고 따졌다. 사전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는데 건교부와 도청도 옳다고 했다. 그런데 토공과 주공이 앞장서고
일부 재벌들이 돈벌이에 나서게 되면서 엉망이 됐다. 선진국은 도시계획이 먼저 서고 치안 공권력과 교회가 이어 들어온다. 그런다음 아
파트, 주택이 세워진다. 이런 계획성이 없어 야단법석이 난 것이다.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대담 우상표 편집국장

1931년 양지면 추계리 47번지에서 연안이공 이병옥님과 민영순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43년 제동초등학교
를 졸업하고 49년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54년 서울공대를 마친 후 57년 미국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신문학을 수학했다.

1956년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에 몸을 담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정치부장, 논설위원, 주미특파원, 편집국장을 역임했
다. 1980년 대통령 공보수석 겸 대변인, 82년 문화방송 사장, 86년 언론회관 이사장과 그해 8월 문화공보부장관으로 발탁됐다.

이웅희 의원 약력
양지서 태어나 신문기자
3선의원 문공장관 역임

1988년 한국프로야구위원회 총재 재임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고 성균관 이사장을 역임했다.
13대 국회에 진출한 이래, 중진 3선의원으로서 당직으로는 지역감정해소 및 당 발전 특별위원회 위원장, 중앙정치 교육원장, 당무위원을
맡았으며, 국회건설위원회 청원심사 소위원장, 한일연맹 사회문화위원장, 재경경제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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