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당 이씨는 1739년(영조 15년) 12월 5일, 청주 서면 지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부녀자의 솜씨를 익히더니 이윽고 옛 열녀를 마음으로 사모하여 이에 소학, 가례, 여과사서를 취하여 길쌈하는 등 불곁에서 외우고 익혔다.
이어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의 글을 세밀하고 종합하여 이해하고 투철하게 분변하여 해석하니 이씨종족의 남정네들도 앞서는 이가 없었다.
처녀로 있을 때 부친을 위하여 육미와 비단같은 것은 억지로 먹지도 입지도 아니하였고 옛 제도를 지켜 행하고 행동마다 예훈을 따르니 이웃마을에 널리 소문이 퍼졌다. 이때 목천현감인 유한구가 배우자를 잃고 다시 장가를 들 뜻이 없었는데 부인이 15세부터 경사에 통달하고 행신도 훌륭하다는 것을 듣고 기뻐하며 결혼을 하였다.

부인이 가문에 드어오니 시부모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운데다 격한 번뇌가 많았는데 이를 받들고 순종하고 어김이 없었다한다.

평소의 성격이 엄격하고 예에 근거를 두고 박식하여 남이 이간질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여러 동서들은 문벌좋은 세족이며 시누이들은 가정이 부유한 귀족들인데다 나이마저 곱절씩 되어도 서로 공경하고 중히 여기기를 마치 큰 손님 보듯이 하였다.

옛 태교가 현재에 시행되지 아니함을 한스럽게 여겨 경전을 근본으로하여 의학서를 참고하고 넓게 책을 수집하여 3편의 책을 지었는데 이것이 '태교신기'로서, 세상을 착하게 하고 사물을 열어주는 마음의 책장위에 넘쳐 흐른다.

부인이 남편을 여의고 어린 자녀를 이끌고 용인에 와서 살고 있는데 사람생활에 필요한 것이 쓰려고 하면 없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자녀들은 굶주리고 곤란하다고하여 학업을 폐하지 아니하였고 시집 장가보내어 의로운 교훈속에서 성립시켰다. 경은 더구나 총명하였다. 고 목천현감 유한규의 배필인 전주이씨 사중당. 나이 83이던 1821년 별세하였는데 유언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편지글한부와 목천공의 성리답문, 자신이 등사한 격몽요결 1통을 옷깃속에 넣으라고 하였다.

정묘년에 용인의 관청동 당봉(현 모현면 왕산리)아래 장례하고 목천공의 묘를 이장해 합장하고 아들 정이 3년상을 마치고 와서 묘비명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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