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사람들이 집으로 향하고 인적이 드믄 밤 10시쯤, 어둑한 골목길에서 리어카를 세워두고 무언가를 열심히 모으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김종실(51), 안하자(51)씨 부부다. 재활용품을 수집해서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이 이일을 시작한 것은 약 1년전부터다.
"그야말로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지경이었죠.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낮에는 차량이 많아 리어카를 끌고 다닐수가 없어 차가 그나마 뜸한 저녁시간에 이들은 일을 한다. 남편 김종실씨는 본래 건설일용노동자였다. IMF 이후 건축경기가 뚝 떨어지면서 많은 주위사람들과 함께 일거리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재활용품 수집.
올해 50년을 넘긴 그의 삶은 한국산업화 과정이 빚어낸 한 부류의 전형이다. 김종실씨의 고향은 진주다.
그는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4남 3녀의 형제중 장남이다. 그의 아버지는 남의 농토를 빌어 농사를 지어서는 많은 식솔들은 먹여 살릴 재간이 없자 김씨의 나이 10여세쯤 될 때 빈손으로 서울로 향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등지고 희망을 찾아 서울로 향했던 것이 정부정책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산업화 초기, 값싼 노동력이 경쟁력이 전부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론 농촌인구를 강제적으로 도시로 유입해 그들을 임금 공장 노동자로 만들어야만 했다. 값싼 노동력과 고된 노동에 산재가 속출했고 노동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도시하류민을 형성하는 것은 일반화된 행로.
김종실씨의 삶은 바로 그 전형이었다. 서울 청량리 무허가 움막에서 살던 그의 가족은 강제철거에 떠밀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가 용인에 내려온 것은 18년전으로 일자리를 찾아서였다. 생면부지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용인땅. 더구나 건축현장에서 일을 하던 중 사고를 당해 다리마저 정상적으로 쓸 쑤 없는 처지였던 그는 불편한 몸으로 또 막노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IMF 이후 일거리가 가뜩이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설자리는 더욱이 좁았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종이라도 주어야지요"

이렇게 해서 리어카 한 대를 간신히 마련해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일과는 오후부터 시작된다. 오후 5시경이면 부인 안씨와 함께 리어카를 끌고 나선다. 그들이 수집하는 것은 파지, 신문, 빈병 등이다. 4개동을 중심으로 다니다 이들이 임시 집하장소로 쓰고 있는 마평동에 돌아오면 밤 10시-10시30분경.
이때 집에 돌아가 쉬고 아침이면 다시 나와 수거한 재활용품을 정리한다. 이렇게 해서 한달 정도 모아 놓으면 중간상이 차량으로 거둬간다. 대략 한 번 가져갈 때 받는 돈이 15만-20만원선, 이것이 이들 수입의 전부다.
왜 공공근로사업이라도 나가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대해 김씨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이장이 공공근로사업 나가라고 하는데...나보다 더한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편치않은 몸에 한달 수입 고작 20만원선, 이 정도면 당연히 저소득 실직가정 결연사업을 통해서도 생계지원을 받을 수 있으련만 그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일할만한데 내가 벌어 내가 먹어야죠"
포곡면 삼계리 외진 무허가 집에 살면서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최하층의 생활을 하지만 남에게 의지하고 살지 않겠다는 그의 삶의 자세. 리어카를 끌고 다시 거리로 나서는 부부의 뒷모습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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