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하 · 최호철 교수 ‘고림동 이야기’(가제) 펴내
개발에 무너지는 수도권 동네의 풍경과 삶 담아

 


그들 만화의 주인공은 ‘공간’이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동네와 공동체의식이 살아있는 마을. 그러나 장면은 거기서 정지되지 않는다. 마을 앞으로 도로가 나고, 공장이 들어서고 마침내 마을은 허물어져간다. 그리고 거기 함께 머물렀던 모든 흔적들이 사라진다.

그들 만화의 주인공은 ‘고림동’이다. 더 정확하게는 고림동으로 대변되는 서울의 외곽으로 불리는 수도권 경기도다. 개발에 밀려나는 약한 자들의 공간이 그들 만화의 주인공이다.

최호철 교수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박인하(42) 최호철(47) 교수가 공동 작업하고 있는 만화 ‘고림동 이야기’(가제, 창비에서 올 여름 발간 예정)는 처인구 고림동의 개발 과정을 담고 있다. ‘산골마을 잔혹사’라는 소제목으로 책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고림동의 변천사는 야트막한 산골에 자리 잡은 한 마을이 개발과 산업화에 노출되면서 어떻게 변모해가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30여 가구 100여명의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던 인심 좋은 마을. 풍족하진 않아도 부족함 없이 농토를 일구며 자족하던 마을에 변화를 일으킨 첫 번째 사건은 영동고속도로 개통이다. 마을 앞으로 도로가 나면서 미관을 위해 마을의 지붕은 슬레이트로 바뀐다. 그리고 길을 따라 줄줄이 들어오는 공장들. 서울에서 밀려난 피혁, 화학, 제지공장 등 공해업체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은 변하기 시작한다. 공장에 농토를 팔아 현금을 만지게 된 주민, 셋방을 얻으려는 공원들을 위해 집을 개조해 쪽방을 만들기 시작하는 마을 사람들, 농사일 대신 낮술에 흥청대기 시작하는 마을, 천렵하고 멱 감던 경안천에 폐수가 쏟아지고 피부병과 식중독에 걸리는 아이들, 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 산골마을은 그렇게 변해갔다.

2012년 지금, 마을은 어떻게 됐을까. 이웃하던 이들은 대부분 떠나가고 몇 채 남지 않은 낡은 집에는 노인들과 도시에 살고 있는 자녀들이 맡겨두고 간 어린 아이들만이 남았다. 그리고 한 동네 살고 있어도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는 외지인들 뿐. 공장들 역시 값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으로 이전해 갔다. 공장지대는 대단위 아파트 부지로 계획돼 방치됐다.

 

인심 좋던 마을이 공장지대로

이야기그림책 ‘고림동 이야기’는 고림동 토박이 윤기헌 부산대 교수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윤 교수는 고림동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마을의 변천사를 생생하게 지켜봤다. 박인하 최호철 교수는 윤 교수의 글에 주목했다. 만화평론가인 박인하 교수가 기획과 스토리텔링을 맡았고 최 교수가 그림을 그렸다. 기획부터 준비과정만 2년이 걸렸다. 윤기헌 교수의 글을 바탕으로 고림동을 비롯한 용인지역을 여러 차례 답사하고 취재하며 작품을 만들어냈다.

다큐멘터리 만화작가인 최호철 교수는 그동안 풍경과 인물이 어우러진 그림을 선보여 왔다. 와우산(1995, 국립현대미술관)을 시작으로 을지로순환선, 북아현동 등 서민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골목길의 풍경과 개발에 밀려난 동네 풍경이 회화와 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의 손에서 작품으로 태어났다. 그런 그가 고림동에 눈길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과 풍경 그 익숙한 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내고 있는 거지요. 이전의 것들은 모두 지워지고 약한 자들의 삶의 흔적이 사라져 가는 공간의 느낌을 그림으로 재구성해 기록해 놓는 작업입니다. 거기서 밀려난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떠돌며 살고 있겠죠.”

서울에 가까이 있는 원죄로 개발의 숙명 앞에 놓인 수도권 도시와 도시민들의 삶이 그의 작품의 주제다. 그 역시 용인을 비롯해 안산, 성남, 의정부 일산을 거쳐 현재 하남시에서 산다. 서울을 빙 두른 위성도시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개발의 갈등이었다. 주민들은 개발로 인해 공동체와 그곳에 있던 역사를 빼앗겼다.

“인간과 자연, 공간이 오랫동안 맺어왔던 관계는 무시하고 지워버리는 것이 개발이에요. 이후 그들이 살았던 곳은 그저 거래가 되는 공간에 지나지 않게 되죠.”

“공간 용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박인하 교수

박인하 교수는 고림동과 이웃한 양지면에서 10년째 살며 용인의 역사, 문화를 관심 있게 보고 있다. ‘고림동 이야기’를 준비하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수여선이다.

“수원 여주를 연결하는 두량의 협궤열차의 속도를 추정해보니 시속 20~30km 정도에요. 그것을 타고 장에도 가고 통학도 했다는 거지요. 만약 지금까지 협궤열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수록 아쉽죠. 용인에 재밌는 구석구석들이 무척 많은데 그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지 못하고 왜 전통문화가 사라진다고만 안달하는지 모르겠어요. 경전철에 드는 예산을 수여선 복원에 썼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거기에 더 큰 부가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고림동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잦은 이사로 집과 공동체에 대한 기억이 없는 사람들, 환금성과 교육으로 가치가 교환되는 아파트, 그로 인해 더욱 황폐해지는 삶, 박인하 교수는 반문한다. “이것이 정상인가?”
공간이란 마음을 기대고 어우러져 살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박 교수는 요즘, 10년간 살던 주택의 집수리를 위해 잠시 면 소재지에 나와 살고 있다. 집을 고쳐서 팔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마음을 바꿨단다. 가족의 추억이 담겨 있고 아이들의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기에 그는 그곳에 계속 머물기로 했다. 집은 건물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물류창고, 송전탑, 골프장이 즐비한 공간, 용인. 우리 공간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어요.”

이번 이야기 그림책은 창비문학 블로그 창문에 연재중인 작품을 엮어 낸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와 그려야할 그림들이 그들에겐 남아 있다. 봄과 여름을 지나 완성된 단행본은 독자들의 손에 들려지게 된다. 책에는 고림동을 비롯해 하남 광주 양수리 판교의 이야기도 함께 담긴다. 

파괴된 마을공동체, 그리고 피폐해진 인간성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는 서울 주변인들에게 현존 마을 고림동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들의 자화상에 다름 아닌 고림동, 거기에 오래된 미래가 있다.


‘동네 화가’ 최호철의  이야기 그림 미리보기

기흥에서 처인으로 넘어가는 42번 국도에서 본 처인구 전경. 행정타운과 경전철 역 등 길을 타고 형성된 개발의 현장이 한 눈에 펼쳐진다.
어느 새 고속도로와 공장굴뚝이 마을 풍경을 대신하게 되었다.
고림동 앞을 흐르는 경안천. 위로부터 1960년, 1990년, 2010년대 변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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