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성자 슈바이처는 “생의 외경”이라는 말을 썼다.
이 지상에서 태어난 우리들의 생명이 얼마나 존엄한 것인가를 생각한 끝에 쓴 말일 것이다. 슈바이처는 비단 인간뿐 아니고 모든 생명체에 대한 고귀함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촛불을 켜놓고 독서를 하다가 그 촛불에 날벌레들이 달려들어 타죽는 것을 보고 불을 끄고 독서하던 책을 접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우주는 영원히 존재하는데 단 한번 한순간의 생명체로 태어나 일생을 살고 간다는 것은 참으로 값지고 경건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진실로 소중하고 고귀하게 그리고 값지고 보람있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러한 소중하고 귀한 생명체가 그리 길지 않은 일생을 살아 가는 삶의 터전 또한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인간의 사회는 도덕률이 있고 질서가 있고 사랑이 있고 협동하며 공존공영의 틀을 만들어 살아 왔다. 또한 삶의 거주지를 따라 이동하기도 하고 더러는 삶의 터전을 힘있는 자들에게 빼앗기고 유리하며 새로운 터전을 찾아 고단한 길을 떠나기도 했었다. 유달리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낳고 자란 터전을 고향이라 일컫고 고향을 어머니의 품이라고 표현했던 우리의 가치관이 이를 증명한다.

산업사회의 다변화로 인해 삶의 터전을 일구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중노래 가사 말에 이르듯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며 표현해 노래했지만 고향만 하지 못한 향수를 노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용인을 새로운 터전으로 정을 붙이고 살아온 지 벌써 20여년이 되었다. 어디를 가든 용인이 살기 좋은 곳이고 정이 가득한 곳이라고 자랑할 만큼 용인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매스컴이나 언론에서 ‘용인’이라는 소리만 들리면 눈과 귀가 번쩍이며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용인사람이 된 이유라 싶다.

최근에 내가 살고 있는 용인이 언론과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하나는 도시계획도 없이 인허가된 무질서한 난개발 공사로 인함이고 또하는 용인시가 토지매입과정에서 사기를 당했다는 황당한 내용이 신문과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동안 방송과 언론에 보도된 용인과 관련된 크고 작은 사건과 일들을 떠올려 보면 우울해진다.

귀한 생명으로 태어나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다가는 소중한 터전이 왜 이리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사에 휘말리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수필가·꽁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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