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시작되는 첫 날, 전철에서 있었던 일이다. 자리에 앉아있던 50대의 아주머니는 바로 앞에 선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 제법 큰 어린이를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한동안 쳐다보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몇 살이냐. 몇 학년이냐. 꼬치꼬치 물은 후 어린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라는 것을 알자 아주 근엄한 표정으로 훈계를 했다.

내용인즉 무슨 어린애가 전철 속에서 ‘이어폰’까지 끼고 요란을 떠느냐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린애답지 않다는 말씀이다. 어린이는 무안해서 얼굴이 빨개지더니 저만치 가 버렸다. 아주머니는 자신이 대단한 일이나 한 듯이 요즘 애들은 참 큰일이라면서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 어린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책없는 여자가 왠 참견이냐고 욕을 했을까. 어린애는 음악도 못 듣느냐고 분을 삭였을까. 아니 실은 음악을 들은 것이 아니고 요즘 외국어 바람에 영어 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잘못한 것도 없는 그 어린이가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아주머니는 왜 그렇게 치마폭 넓게 참견을 했을까. 설사 눈에 좀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해도 그냥 넘어 갈 수는 없었을까. 또 실제 어린이의 행동이 그렇게 잘못된 행동이었을까.

결국 문제는 어른들의 잣대였다. 나름대로 늘였다 줄였다 하는 자의적인 어른들의 잣대. 아주머니의 잣대로는 어린이는 전철에서 그저 얌전하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의 어린이들과 비교를 할 것이다. 솔직히 지금의 어린이들과 비교한다면 과거의 어른들은 무척이나 억압된 사회에서 살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자랑할 훈장이란 말인가. 시대는 빠르게 변한다.

지금의 어린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세계를 공유하는 세대다. 어린이들에게는 그들만의 소중한 세계가 있다.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있다. 판단이 있다. 그런 어린이들을 어른들의 잣대로 무조건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요구하는 존재가 아닌 어린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로서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린이가 아니라 바로 어른들이다. 어린이들에게 투영되는 어른들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가. 차마 부끄러워 얼굴을 못들 것이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배우면서 자란다. 무엇을 보는가. 어른들의 모든 것을 볼 것이다. 어른은 바로 어린이들의 교과서다.

그러나 요즘의 교과서는 너무나 잘못됐다. 보고 배우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로 잘못되어 있다. 온갖 못된 것은 모두 수록이 돼 있는 어른이란 이름의 교과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는 어른들이 너무나 잘 알 것이다. 교과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만드는 것이 지금의 어른들이 할 일이다. 휴지만도 못한 어른들의 권위로 어린이들 위에 군림할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진정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야 할 것이다. /본지 객원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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