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중학교 전경. 이홍광 석상.

이홍광은 중국에서 특히 동북지역에서는 영웅적인 항일열사로 추앙받고 있다.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인 모택동까지도 “리홍광은 동북에서 유명한 의용군 영수(領袖)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칭송할 정도다.

현재 이홍광의 명성은 해방직후 중국 화북(華北)지방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이 중국동북지역으로 왔
이홍광 초상 (출처: 2005.8.23 한겨레신문)
을 때 한 지대(支隊)의 이름을 '이홍광지대'로 명명하여 기념한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대는 국공내전(國共內戰)의 와중에서 중공당을 지원하여 크게 활약했다. 이홍광이 주로 활동했던 이통현(伊通縣) 유사저자둔(留沙咀子屯)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1985년에 세워졌다. 또 현재 길림성 반석시에 있는 조선족 중학교의 이름을 ‘홍광중학’이라 명명했고, 그가 활동했던 반석현(현재는 반석시) 깍지산 부근의 조선족 마을은 ‘홍광촌’으로 불리고 있다. 또한 그가 전사한 신빈현 시내 뒷산에는 흉상이 세워졌다.

영웅적인 항일투쟁을 벌인 이홍광의 출생지가 경기도 용인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중국에서 편찬된 이홍광의 전기문에서도 용인이라고 밝히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경기도 용암군(龍岩郡)이나 용임군(龍任郡)이라고 한 기록도 있다.

한편 앞서 말한 중국 길림성 반석시에 있는 홍광중학교 자료관에는 출생지를 용인군 용인면으로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충남 아산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용인 출신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이홍광이 고향이라고 밝힌 용인군 단삼동이 용인에서 비슷한 지명을 찾아볼 수 없어 더욱 혼란에 빠트린 것이다.

그러나 금년 1월 20일 경 용인이씨 청백리공파 종중 고문인 이광섭씨의 제보에 의해 이홍광은 분명히 그 출생지가 용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서울여대 사학과 이원명교수가 연변대학 관계자와 함께 이홍광이 용인이씨라는 것을 밝혀내고, 이광섭씨와 함께 용인이씨 족보에서 그의 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국내 거주하는 인척들의 증언을 통해 이홍광이 만주로 이주한 사실과 그의 출생지가 현 포곡읍 신원리 400번지에서 출생한 것을 알아냈다. 

▲ 신빈현 소재 이홍광 흉상
포곡읍사무소 발행 제적부와 용인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홍광은 홍규(鴻圭)로 되어있다. 조부는 준상(駿相)이며 부는 복영(福榮)이다. 남동생인 학규(鶴圭)가 있다. 그의 가계를 보면 조선 선조(宣祖)때 무관인 이일장군의 13대손이다. 이일장군은 선조때 여진족인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고 임진왜란때 공을 세웠으며 한성부 판윤을 지내기도 하였다. 족보상의 기재가 사실이라면 선조대대로 무관의 기백이 이어져 왔음을 짐작해본다.

한편 중국에서 발간된 이홍광의 전기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이홍해(李弘海)였으며 이홍규(李弘奎), 이의산(李義山) 등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그는 후일 민족운동에 투신하면서 이홍광(李紅光)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 집이 가난했다고 하지만 조부 ‘이상준’은 학식이 있어서 이홍광의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가족은 조부와 부모, 남동생 ‘이학해(李學海)’, 그리고 여동생 경희 ․ 경순 ․ 경남 등 여덟 식구나 되었다. 그의 부친 ‘이보경’은 그런 가운데서도 이홍광이 10세 때인 1919년에 보통학교에 보냈다.” 로 되어있다.

장세윤 <잊혀진 항일투사 이홍광의 생애와 만주지역 항일투쟁>《한국독립운동사속의 용인 》 2009 인용 

족보 기록과 전기문 기록을 비교하면 족보상의 이름인 홍규(鴻圭)와 그의 이명인 이홍규(李弘奎)의 음이 일치한다. 또한 아버지도 족보상의 복영(福榮)과 전기문의 이보경도 발음이 유사하다. 조부도 역시 준상과 상준으로 글자 앞뒤만 바꼈을 뿐이다. 이는 이홍광이 만주로 가서 동료나 부하들에게 자신의 가계를 구술로 설명하면서 변형되었을 것이며, 이것도 여러 차례 구전되거나 인용되면서 약간 변화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용인군이 용암군 또는 용임군으로 표기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홍광의 족보상 가계와 전기문의 가계는 일치한다고 봐야 된다. 이홍광은 일제의 수탈과 탄압이 심해져서 생활이 곤란해 지자 고향인 현 포곡읍 신원리를 등지고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장세윤 박사는 앞의 논문에서 이홍광(李紅光)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홍광은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지명도가 높은 인물이며, 북한에서도 상당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우선 그는 몇 안되는 남한(경기도 용인) 출신 동북항일연군 지도자의 한 사람이고 거의 온 가족이 항일투쟁에 헌신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둘째, 남만주 지방에서는 거의 최초인 1930년대 초 항일유격대 창건의 기초를 닦음으로써 후일 중국공산당계 항일무장투쟁 세력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 부분이다. 셋째, 국내의 민족해방운동이 외견상 침체에 빠져 있을 때인 1935년 초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일제 관헌에 큰 타격을 주고 우리민족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던 사실. 넷째, 그가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오늘날 중국인들에게도 ‘항일민족영웅’으로 널리 추앙받는 양정우(楊靖宇, 본명 馬尙德) 등 중국인 지도자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서 재만한인(在滿韓人)과 중국인 사이의 연대(連帶)를 강화시킨 점. 다섯째, 해방 이후 북한정권의 핵심부가 거의 중국 동북지방에서 투쟁했던 인물들로 구성되었으므로 이홍광을 중심으로 한 재만한인들의 활약상을 검토해보면 부분적이나마 한국현대사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점. 마지막으로, 일제의 패망 이후 중국 동북에서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내전이 격화되었을 때 다수의 한인들이 중공군에 가담하여 국민정부군과 싸웠는데, 이 때 활약한 조선의용군의 한 지대를 ‘이홍광지대’로 명명할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는 사실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중국 특히 동북지역에서 이홍광과 관련한 수많은 기록이 있는 것을 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떠한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리주산 등이 저술하여 중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펴낸 <불후의 넋> (항일민족영웅 리홍광장군의 생애)에서 다음과 같이 불후의 업적을 남긴 혁명가로 묘사하고 있다.
“1910년 조선 경기도 룡인군 단삼동의 빈농가정에서 출생. 1926년에 전 가정이 길림성 이통현 류사저자툰에 이주.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1년 중공 반석중심현위 위원으로 당선되고 반석현 2구 하마허즈 오호 동네로 이사하였음.

<9.18> 사변 후 리홍광은 친일 한간주구(漢奸走狗)를 족치는 <개잡이 사냥대>를 조직하고 대장직을 맡고 1932년 봄에 유명한 하마허즈 농민대폭동을 조직지도하여 한간주구를 처단하고 총탄약을 노획하여 당의 항일무장투쟁을 건설할 준비를 하였다. 이해 여름 <개사냥대>를 토대로 반석 반일 로농의용군을 세우고 겨울에 양정우의 지휘하에 로농의용군을 중국 로농홍군 32군 남만유격대로 개편하고 3개 대대와 1개 교도대를 두었다. 리홍광은 교도대 정위직을 맡고 반석, 쌍양, 의통, 화전, 영길지구에서 동북 최초의 반석 항일유격근거지를 세웠다.

1934년 1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정식 설립되고 리홍광이 제1사 사장 겸 정위직을 맡았다. 그는 양정우 장군의 친밀한 전우였고 부하였으며 ‘후란장즈전투’, ‘삼원포탈취’, ‘대황구 포위권돌파’, ‘소본량 격퇴’, ‘라산성 함락’, ‘국내 후창군 동흥성 분쇄’, ‘일본 관동군 데쯔이다 사령 격사’, ‘위만(僞滿) 통화현장 나포’ 등 전투를 몸소 지휘하여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해 5월 리홍광은 환인 경내에서 왜놈 토벌대와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하였다. 양정우장군은 비문을 듣고 비통을 금치 못하고 장군을 추모하면서 홍군(紅軍)의 엄중한 손실이라고 말하였다. 중국인민은 리홍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족 청년들로
이홍광묘와 그의 행적을 연구해 온 중국인 학자 조문기씨.
묶어진 ‘리홍광 지대’를 건립하였다.”

이홍광은 1935년 5월 13일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일본군 총탄을 맞고 26세에 전사하였다. 부하들은 그의 시신을 신빈현 홍묘자향 대청구 헤이싸즈에 묻었다. 이홍광의 묘는 2005년 8월 한겨레 신문에 의해 처음 국내에 알려졌다. 그 후 2007년 이곳을 방문한 용인항일독립기념사업회 탐사단에게 주변 마을 주민은 이곳에 유명한 항일유격대장군의 무덤이 있었으며 무덤을 만들 때 측근 부하 몇 명만 가서 묻고 왔다는 말을 마을 노인들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했다. 이곳을 함께 찾은 중국인 학자로 이홍광의 행적을 연구해 온 조문기(曺文奇)씨는 “시신을 묻고 돌을 쌓아 봉문을 만드는 것은 이곳 토착민은 하지 않는 한국식이다. 이 무덤은 이홍광의 무덤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제 불굴의 항일영웅 이홍광의 출생지와 무덤이 밝혀졌다. 용인지역에서는 이제 확실하게 이홍광에 대
▲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태성중학교 교사
한 기념사업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중국 당국의 협조를 구해 이홍광 묘소에 대한 체계적인 고증과 정비가 필요하다. 이와 함께 비석을 세워 이곳이 항일영웅의 묘소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다음으로는 이홍광의 여동생과 가까운 친척이 용인 등지에 생존해 있다고 한다. 이분들과 용인이씨 문중이 함께 이홍광에게 독립운동유공자 서훈이 추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용인의 교육당국과 길림성 반석시의 유일한 조선족 중학교인 홍광중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고 청소년들이 서로 방문하여 교류를 가지면, 이홍광의 민족독립정신을 함께 되새기면서 실질적으로 한국과 중국의 우호를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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