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7년 전의 일이다. 내가 한참 젊었을 때였다. 그 때 문수산에서 마애보살상 2위를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내가 사는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 같기만 하였다.
사람이 살다가 정말 사는 보람을 느끼는 때가 몇 번이나 있을까?
그러나 무슨 재산이 불어난다거나 국가나 지방에서 표창장을 준다거나 승진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 일을 혼자 하면서 공연히 때로는 감격하고 웃기도 하면서 실속을 차리지 못하니 참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남들은 어떻겠는가? 더러는 미쳤다고도 하고 6촌 형님으로부터는  “젊은 놈이 허구한 날, 남의 조상 묘지나 찾아다니니 그게 밥 먹고 할 일이냐”는 핀잔도 들어가면서 반평생 이 짓을 했으니 그것이 천성이거나 아무도 못 말리는 고질병이었던 것 같다.

▲ 천여년간 숨어 있던 문수산 마애보살상(좌측 암각상)

문화재에 미쳐본 자만이 알고 있는 묘미

그러나 감춰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문화재를 내 발로 뒤져내고 그 가치를 규명하고 고증하고 그러는 동안 나는 배우고 지식을 얻는다.
이 묘미는 이 방면에 미쳐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는 동안 부수적으로 나에게 몇 가지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용인을 제 것으로 아는 가난한 부자 이 인영’  ‘살아있는 용인문화사’  ‘용인학 박사’  ‘용인문화의 거인’  ‘움직이는 용인백과사전’ 등등. 이것이 반평생을 넘게 용인 향토문화연구에 몸 바쳐 온 결과 언론에 비춰진 자화상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 시간과 청춘을 투자한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이것을 변명하자면 “내가 몸담았던 이 시대의 용인이 나를 필요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거기서 내 몫을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필연이 또 다른 유적과의 인연을 만들었다.
1982년 7월 31일, 오토바이를 타고 원삼면 사암리 내동마을을 지나칠 때,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새마을사업으로 암거 매설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때 공사를 지휘하던 김희백 이장을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이 계장, 저 산이 왜 문수산인지 아시요?”라고 물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산이 생길 때 출생신고를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자기네 동리에 있는 산 이름을 내 어찌 알겠는가?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일하던 마을 사람들이 주위를 빙 둘러서서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것인가 기대하는 눈치 같았다.

문수산에 숨겨진 불상 찾아 헤매

“모르기는 하지만 그 곳에 무슨 절터 같은 게 있는거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절터? 아 있잖아, 거기 무슨 빈대가 많아서 불태워 없앴다는 절터…”
“그럴 테지요. 그 절 이름이 문수사였거나 아니면 무슨 불상이 있다거나 했을 겁니다. 혹시 그런 것 있다는 얘기는 없습니까?”
“불상? 그랴, 거기 절터 바위에 불상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구먼.”
“옛? 불상이 바위에? 히얏, 그걸 왜 진작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곳이 어디쯤입니까?”
“저기. 저 산 보이지요 거기 아마 8부 능선쯤은 되는 곳일겝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오토바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치닫다가 내려서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오뉴월 삼복이 아닌가? 더구나 인적이 끊어진 산에는 억새가 자라서 키보다도 더 컸고 숲이 우거져 좌우를 분별키 어려웠다. 산 중턱 쯤에 이르자 물에 빠진 생쥐처럼 땀이 흘러 옷을 적셨고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 눈물인지 땀 물인지 시야가 흐려졌다. 살가죽에서는 올록볼록 땀띠가 솟아났다. 억새풀에 긁힌 팔뚝에서는 피가 흐르고 쓰라렸다. 천신만고 끝에 절터를 찾기는 했으나 기대했던 불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바위하나를 찾기는 했지만 불상은 없었고 바위에 새긴 맷돌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터는 분명한 것 같았다. 바위의 앞뒤를 살피다가 이크, 이번에는 팔뚝만큼이나 굵은 뱀 한 마리가 조릿대 숲으로 기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등골이 오싹하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입맛이 싹 가셨다.
‘에쿠, 이 험한 산속에서 불상을 찾다가 독사한테 물리면 아까운 인생 속절없이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에이, 내려가자 인연이 있으면 현신하겠지.’
몽둥이를 하나 찾아 들고 풀섶을 두드려 가며 발길을 옮겼다. 그래도 산을 오를 때 보다 내려올 때가 조금은 수월하였다. 그리고 시야의 폭이 넓어져 가파르지 않은 산등성이를 찾아내려 올 수 있었다. 점점 절터가 멀어지자 뱀의 소굴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어 안심하고 있을 때 “으악!” 철퍼덕 땅이 꺼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허방다리 함정에 빠진 것이다. 겨울에 고라니나 멧돼지를 잡기위해 파 놓은 함정인 듯 하였다. 여기에 내가 빠진 것이다.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였다. 허방다리 함정 입구에 몽둥이를 가로 걸치고 가까스로 기어 나오자 어디 부러진 데는 없는지 팔다리를 점검해 보았다. 어깻죽지가 좀 결리는 것 같았을 뿐 부러진 데는 없었다.
 
눈앞에 두고도 못 찾은 마애보살

장님 개천 나무라듯 중얼거리며 거의 녹초가 되어 산을 내려왔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불상을 연구하는 전문가도 아니다. 그래도 그것이 조상들이 남긴 유물이라면 일단 그게 어떤 종류이건 상관없이 무슨 관할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필생의 의무감 같은 것에 끌려 거의 최면상태로 내 스스로가 빨려드는 것이다. 
“이놈의 뱀이 겁을 주고 허방다리 함정에 나를 빠트렸지만, 나는 다시 온다. 이놈아 두고 봐라”
그리고 다음 일요일인 1982년 8월2일 두 번째의 원정길에 나섰다. 장갑, 긴 소매, 워커, 카메라, 물통, 스틱, 완전군장(?)을 갖추었고 내동 마을에서 잔뼈가 굵었을 뿐 아니라 문수산, 구봉산 일대의 산을 손금 보듯 한다는 문수산 도사 이세준(李世俊· 당시44세)씨를 만났다.
문수산 도사 셀퍼 이세준, 그 사나이는 나처럼 무턱대고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다니던 익숙한 길을 찾아 가면서 뒤엉킨 칡덩굴 풀과 잡목을 낫으로 끊어내고 헤치더니 수월하게 절터에 이르렀다.
절터, 깨진 기왓장, 바위에 새겨진 맷돌 자국 조릿대 숲, 먼젓번에 왔던 절터 맞잖아, 그런데 왜 불상이라는 게 눈에 띄지 않았느냐 이거다.
“형씨, 엊그제 내가 찾아 왔던 곳입니다. 여기에 뭐가 있다는 겁니까? 불상 있다는 곳이 맞기는 맞습니까?”
“맞기는 맞습니다만 선생님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맞을 겁니다. 아마.”  맞기는 맞는데 내 눈에 띄지 않는 것도 맞는 말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 문수산 마애보살상(우측 암각상)

마주보는 두 보살상 천년의 베일 벗다

“그럼 선생 눈에는 보이는데 안경까지 끼고 있는 제 눈에는 안 보인다는 말입니까?”
이 도사는 말대답 대신 피식 웃더니만 “그럼 따라오시지요”하더니 전날 뱀 한 마리가 기어들어가던 가파른 조릿대 숲으로 나아가 우거진 조릿대를 헤집고, 앞에 늘어진 참나무, 느티나무 가지를 톱으로 쓸고 낫으로 자르고 길을 냈다.
절터로부터 30여 미터를 오르자 V자같이 좁은 협곡 막다른 곳, 거기 바위 좌우로 마주보고 서 있는 마애보살이 미소를 머금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이런 암각문화재가 용인에도 있었다니, 이렇게 고풍스럽고 훌륭한 문화재가 어째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고 있었는가? 참 신비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정말 기대하지 못했던 문화재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동안 뱀에 놀라고 함정에 빠지고 억새풀에 베이고 했던 정도의 고행은 조금도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마주보고 서 있는 두 보살상은 서로 밀어라도 속삭이다가 들킨 듯 말이 없었지만  미소의 여운은 미처 감추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무엇이 수줍은 일이기에 그렇게 많은 나날들을 정적과 침묵의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는 말인가? 넋을 잃고 찬찬히 살펴보다가 산 사나이 도사에게 말을 걸었다.
두 암각상 보기 드문 완벽한 대칭 이뤄

“이 선생, 보이십니까?”
“뭐가요?”
“불상 말입니다”
종전에 나에게 “선생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맞을 거”라고 말한 대로 불상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도사는 쩝쩝 입가에 담배를 물더니만 놀리는 말인 줄 알았던지 좀 떫다는 말투로 “이게 불상이 아니면 그럼 사람입니까?”라면서 말을 되받았다. 이 도사는 그냥 별 생각 없이 불상만 보았던 것이다. 나는 차근차근 불상이 지니고 있는 특징을 설명했다.
“선생, 잘 보십시오, 왼쪽 불상은 왼쪽 손을 들어 가슴에서 식지를 잡았지요? 그런데 우측 불상은 그 반대로 오른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고, 식지를 잡았지요.”
“그렇군요.”
“그리고 왼쪽의 불상은 바른 손을 아래로 내렸고, 우측 불상은 그 반대 아닙니까?”
“그렇군요. 그게 어쨌다는 말입니까?”
“그게 좌우 대칭구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군요.” 그제야 내가 보이느냐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수궁하는 것 같아 말을 이었다.
“자, 잘 보십시오. 대개의 불상들은 한쪽어깨에 옷을 걸치거나 옷을 입지요. 좌견편단, 우견편단, 아니면 통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보살상은 상체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반 나상(半裸像)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군요.”
“왼쪽은 보관을 썼지요? 바른쪽은 소발입니다.”
“보관은 뭐고 쇠발은 뭡니까?”
“말하자면 왼쪽 보살은 모자를 썼고 바른 쪽은 안 썼다는 말입니다. 쇠발이 아니라 소발이라고 하지요. 하반신은 복부로부터 옷 무늬(裙衣)가 발목까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앙에 있어야 할 본존불이 없다는 말입니다. 참 알 수 없군요, 이 정도면 거의 보물급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서산에 가면 삼존마애불이라는 게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을 제외하면 대개 홀로 있는 마애불은 많이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두 보살상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면서 마주 서 있지 않습니까? 아마 이런 유형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개인 자격으로 문화재 지정신청, 결실

듣는 이가 불상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도 생각지 않고 내 의견에 적극적인 동의를 구하고 있지를 않았던가.  
이후 경인일보에 발견기사가 나갔으나 군청이나 도청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1년여가 지난 1983년 7월8일 필자는 개인 자격으로 경기도에 문화재 지정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지난 1984년 8월16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그 때 함께 답사에 나섰던 이세준씨는 지금도 무고하신지 모르겠다. 나를 안내해 준 그 수고에 제대로 보답 드리지 못했다.
그후에 고 박용익씨가 2.8m 나 되는 이 보살상을 탁본으로 떠서 전시하기도 하였고, 용인의 각종 문헌에 게재되어 1천여 년 간 잠들어 있던 고려시대의 문수산 마애보살상 2위는 지금 세상 나들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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