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의 고승 백운화상이 초록한 ‘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 佛祖直指心體要節)’이란 활자 인쇄본이 북원 선광 7년에 청주 근처의 흥덕사에서  간행되었다.

북원선광 7년은 명나라 태조 10년이고, 고려 우왕 3년이며, 서기로는 1377년에 해당된다. 이 활자본은 우리나라가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70년, 유럽보다는 200년을 앞선 세계최고의 금속 활자로서 1972년 5월 ‘세계도서전’에서 세계최고의 인쇄본이라는 사실을 인정받았고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전 세계 최초의 활자 인쇄기술과 문화를 보유한 민족이었음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청주는 세계의 활자문화도시로 부상하였고 청주의 랜드마크가 되어 ‘직지’하면 청주가 떠오르고 청주하면 흥덕사를 떠올리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학술적 의미를 가진 역사문화의 소재가 용인에는 없는 것인가? 용인이 고려백자의 시원지라는 것 하나만도 잘 응용하면  청주 못지않은 문화와 역사의 고장으로 거듭날 수 있는 소재가 될 수도 있고, 용인에서 청동거푸집이 출토된 사실도 의미를 부여하면  활용 가치가 매우 클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수신 교양서로서 널리 알려진 명심보감이 용인의 추계리를 관적으로 하는 추계추씨의 중시조 노당 추적이 저술하였다는 사실도 그 하나가 될 수가 있다.

남의 것을 부럽다고 하지 말고 우리의 것을 개발하고 학술적 의미를 부여하여 문화라는 영역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으면 청주의 직지와 같이 지역사회의 브랜드 가치가 창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책 입안자가 없기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금박산 아래 술좌진향으로 자리잡은 추계리 마을 전경
▲ 추계리 계밀양 마을 앞에 세워진 표석, 아래에 ‘추씨관향’이란 글씨가 있다

추계 추씨 시조 양지에 낙향, 명심보감 저술 
 
양지 추씨의 입향조 노당(露堂) 추적(秋適)은 고려 때 예부상서를 거쳐 예문관대제학에 올랐던 추황의 아들로 14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유학의 중조로 받들어지는 안향의 수제자로서 국립대학격인 국학의 교수를 거쳐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한때 환관 황석량(黃石良)이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고향인 합덕부곡(合德部曲: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의 합덕읍)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려고 할 때, 서명을 거부하자 황석량의 참소로 순마소(巡馬所)에 투옥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시랑으로서 북계 용주(龍州)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말년 안향(安珦)에 의하여 발탁되어 이성(李晟), 최원충(崔元沖)과 함께 7품 이하의 관리, 혹은 생원들에 대한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으며 민부상서(民部尙書), 예문관제학에 이르러 치사(致仕)한 후 양지, 추계로 낙향 은거하면서 추계 추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때 그는 유생이나 관원에 대한 유학교육을 실시한 교육자적 경험을 바탕으로 양서인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저술에 힘써 19편의 명심보감초(抄)를 완성하였다는 것이 추계 추씨 문중의 전언이다.

그가 만든 명심보감은 동양서적으로는 처음으로  서구어로 번역되어 서양까지 알려진 수신교양의 기본서로 유명하다. 노당 추적의 명심보감은 1303년에 저술되었으며 노당의 손자 추유가 1363년 중국에 건너가 명나라 공신이 되었는데, 이 때 노당의 명심보감을 가져가 중국과 동남아에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모본으로 하여 1393년 중국 명나라 ‘범입본’의 명심보감이 간행되었는데 추씨 문중에 의하면 흔히 “범입본이 명심보감의 원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시중에 나도는 명심보감의 서문을 보면 대개 “이 책의 원본은 1393년 중국명나라의 범입본이 자녀교육과 사회 안정을 위해 편찬한 것을 고려 충렬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추적이 편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 시중에 나돌고 있는 명심보감 책자들. 대부분의 책에는 중국의 범입본이 초본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손자 추유에 의해 명나라 동남아 등에 보급

추계 추씨의 사적을 보면 노당 추적은 고려 고종33년 병오년(1246) 개경에서 출생하였고, 충혜왕 4년(1317)에 죽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책은 본래 추적이 시랑 겸 국학교수로 재임하기 이전에 ‘인천보감(人天寶鑑)이라는 책이 전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1230년 송나라 고승 담수(曇秀)가 지은 것이며  1290년에 고려에서는 유불도(儒彿道) 삼교(三敎)의 선덕과 가언선행(嘉言先行) 중에서 100여단을 모아 간행하였다.

노당은 고려 고승 인조스님을 통하여 이 책을 얻게 되었고, 이 책의 구성과 제목 등을 자세히 본 후 유교도교(儒敎道敎)의 기초가 되는 문구를 모아 조그마한 책을 초록하게 되었다. 이에 수록된 명구는 260단구였는데 제호는 ‘인천보감’에서 ‘보감’을 인용한 후 그 앞에 명심(明心)자를 붙여 ‘명심보감’이라고 한 것이다.

명심보감의 편저작 연대는 충렬왕 31년(1305)이고 이때는 노당이 이미 벼슬에서 물러나 추계로 낙향했을 시기이기 때문에 용인에서 저술했던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범입본의 명심보감은 “1393년 간행된 것”이라는 것에는 여러 문헌이 일치하고 있는데 이 시기에는 추적이 타계한지 한참 후가 되는 것이니 추적이 범입본을 저본으로 하여 명심보감을 만들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

동서고금 필독서 중국 ‘범입본’보다 90년 앞서 초록

후에 경북 달성군 화원면 소재 인흥서원(仁興書院)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고, 그 때의 목판본이 지금 경북지방문화재로 보존되고 있어 그곳에서는 달성군이 명심보감의 고장이라고 자부하기도 한다.

이 책은 고려시대 때 어린이들의 학습을 위하여 중국 고전서에서 선현들의 금언(金言), 명구(名句)를 편집하여 만든 책으로 목판본과 석판본 등 10여 종이 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지금까지도 일부 학자나 학계에서는 이 책의 최초 저술자가 명나라 사람 범입본(范立本)이라고 하고 있으나 범입본이 간행한 명심보감은 중국의 학생이나 중국인의 정서 위주로 재편되어 우리나라 초학자들에게 읽히고 이해시키기에 어려운 점이 많고 당시대의 정서에 부합되지 않는 점 등에서 노당의 명심보감과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 정설인데 추계 추씨 후손들도 이 책은 주로 한문 초학자가 천자문을 배운 다음 <동몽선습(童蒙先習)>과 함께 기초과정에서의 교양과 수련을 위한 내용으로 저술하였으므로 중국 범입본과는 내용 구성이 다른 독립적인 것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의 ‘명심’이란 명륜(明倫), 명도(明道)와 같이 마음을 밝게 한다는 뜻이며 ‘보감’은 보물과 같은 교본(거울)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으며 추적 이후에 내용을 증보한 여러 이본이 생겼으나 고려 말 조선 초 이후 가정과 서당에서 기본 교재로 널리 쓰였음은 물론이려니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교양서적 중 빼놓을 수 없는 필독서로 손꼽히고 있는 책이다.

용인이 낳은 유산으로 정체성 바로잡아야

명심보감은 2권 1책으로 편집되었다. 주로 유교적 교양과 심성(心性) 교육, 인생관 등에 관련된 내용들이다. 여러 판본이 전하는데 최초의 간행본은 1454년 청주에서 간행되었다고 전하며 가장 오래된 초략본은 1637년(인조 15)의 것이 있다.

명심보감 내용 중에는 예전 우리나라 효자들의 실화를 예로 든 속 효행편(續孝行篇), 한국 사람을 예로 들어 청렴과 의리를 강조한 염의편(廉義篇), 세월의 빠름을 강조하면서 힘써 배우기를 권하는 권학편(勸學篇) 등이 붙어 있기도 하다. 〈명심보감〉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은 공자(孔子)·강태공(姜太公)·장자(莊子)·소강절(邵康節)·순자(荀子)·마원(馬援)·사마온공(司馬溫公 : 司馬光)·정명도(程明道)·소동파(蘇東坡)·주문공(朱文公) 등이며, 많이 인용한 책들은 〈경행록 景行錄〉·〈공자가어 孔子家語〉·〈격양시 擊壤詩〉·〈성리서 性理書〉·〈예기 禮記〉·〈역경 易經〉·〈시경 詩經〉 등이다.  명심보감은 여러 글에서 뽑아 엮은 책이므로 문장의 특성은 없으나, 다른 수신 서적들이 주로 유가(儒家) 중심인 데 비하여 도가(道家) 관계의 책들이 비교적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리고 유가 가운데에는 공자의 말은 많이 인용되지만 맹자의 말은 거의 인용되지 않고, 주희(朱熹)를 비롯한 송대 성리학자의 글들이 많이 인용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유교적 사유방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책이기도 하다.

문제는 학자에 따라서 이 책은 1393년 중국 명나라 ‘범입본’이 초록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이보다 앞선 1303년 추적이 저술했다는 문중의 주장이 다르다는데 있다. 추계추씨 문중의 주장이 맞다면 명심보감의 산실은 용인이라는 데에 문제가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잘만 활용하면 용인의 정체성을 빛낼 수 있는 호재로서 충분하지 않을까?. 동의보감은 의서로써 육신의 병을 고쳤지만 명심보감은 정신문화의 수신교양서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유아뇨분예(幼兒尿糞穢)는 군심무염기(君心無厭忌)로되 노친체타령(老親涕唾零)에는 반유증혐의(反有憎嫌意)니라. 육척구래하처(六尺軀來何處)인고 부정모혈성여체(父精母血成汝體)라. 권군경대노래인(勸君敬待老來人)하라. 장시위이근골폐(壯時爲爾筋骨蔽)니라> -명심보감 팔반가 중에서

“어린자식의 더러운 오줌똥은 그대 마음에 더럽다고 싫어하지 않으나, 늙은 부모가 흘리는 침과 눈물은 도리어 미워하고 싫어하느니, 육척의 몸이 어디서 왔는고, 아비의 정기와 어미의 피로서 너희 몸을 이루었느니라. 그대에게 권하노니 늙어가시는 부모님을 공경하여 대접하라. (부모) 젊었을 때 그대를 위하여 살과 뼈가 닳도록 애쓰셨느니라”
/프리랜서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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