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자란 40대 이후 치고, 5일장 추억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용인에는 김량장과 백암장이 대표적이다. 특히 백암장은 이천과 안성 용인을 잇는 곡창지대 5일장의 모습과 발달 과정을 잘 보여준다. 1과 6자가 붙는 날에 서는 백암장은 이미 조선시대 순조 32년(1832) 배관장(徘觀場)이란 이름으로 문헌에 등장하니, 그 역사는 150여년은 족히 되었다. 

특히 백암장은 보통 ‘쇠전’으로 불리는 우시장이 유명했다. 1918년 조사에 따르면 당시 전국의 우시장이 모두 655개소였는데, 경기도에 47개소가 있었다. 당시 단위시장으로 가장 큰 곳이 거래량이 2만5000두 이상이었던 함북 명천장과 길주장이었는데, 그 다음이 바로 수원장과 용인 백암장으로 2만두 이상 거래되었던 곳이다. 장날이면 전국에서 몰려든다는 수원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쇠전의 발달은 자연스레 상인들의 소를 맡아 관리하면서, 먹이도 주고 체중 늘리는 일까지 담당하는 마방을 육성하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 정육점이 흥했던 것도 쇠전과 연관되어 있다.

그 다음으론 싸전이다. 백암에서 생산되는 쌀은 그 품질과 양에서 인근지역을 압도했다. 따라서 쇠전을 중심으로 싸전이 백암장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 가운데, 곡물전, 어전, 채소전, 유기전, 각종 씨앗을 파는 종자전, 소금을 파는 염전, 각종 바늘을 팔았던 침자전, 철로 주물한 각종 물건을 판매한 철물전 등 갖가지 물건이 거래되었다. 이처럼 활력이 넘쳤던 정기 5일장, 백암장은 큰돈이 오가는 우시장이 있었던 탓으로 제법 규모를 갖춘 유각을 비롯해 도박도 흥했다. 백암 면소재지에만 23개에 달하는 다방이 남아있고, 게임방이 7개나 있는 것도 흥했던 백암장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큰 장은 역시 추석과 설날 대목장인데, 이도 백중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7월 백중장이 서면 청미천 백사장에서 씨름 대회가 열렸어. 힘깨나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인근에서 이름 난 장사들이 나왔지. 사당패들도 이날은 백암장을 찾아 흥을 돋웠으니, 큰 잔치 날이었어.”한 어른의 회고다.   
백암시장은 일정한 반경 내에 있는 마을과 주민들을 서로 연결하기도 한다. 용인을 넘어서 이천의 모가, 설성, 호법, 안성 일죽면 사람들 가운데 웬만큼 연배가 있는 사람들은 백암장을 다녔다. 이들은 백암장을 중심으로 한 생활권 차원에서 주민들간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이는 곧 시장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하나로 묶어주는 끈 구실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번성했던 백암장도 시대의 도도한 흐름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해방 이후까지 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이던 5일장은 1975년을 정점으로 하여 감소 추세로 돌아섰다는 통계가 있다. 고도성장이 이루어지던 당시부터 농촌의 읍, 면 소재지까지 정기 시장이 들어섰고 상가 또는 상설시장으로 시장의 규모와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특히 백암장이 쇠퇴의 길로 들어선 것은 우시장이 사라지면서 부터다. 1963년 6월 축협의 가축 직거래가 이뤄지고, 유통망의 발달에 따라, 1980년대 들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더구나 농협 유통망을 통해 생산과 판매가 조정되다 보니, 싸전까지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더욱 급격히 위축되었다. 요즘의 5일장은 상설시장 주변의 거리나 공터, 시장골목 등에서 장사꾼과 지역주민들이 벌이는 노점이 어우러져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용인자연마을기행(우상표)』1권
<백암마을> 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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