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고구려역사·독립유적지 탐방기


2000년대 초였다. 중국의 국력이 신장되고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자 만주일대 역사유적지를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동북공정론은 여기에 필요한 수단이었다. 당연히 찬연했던 고구려 역사유산은 중국과 우리의 역사전쟁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

용인에서 시작한 <고구려 역사유적 탐방>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화인투어>의 김재영 사장과 <용인시민신문>이 나선 이 사업은 용인지역에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을 현지에서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이번 5차 탐사단의 역사해설을 맡아 참여했다. 비록 오래전에 중국 동북3성 일대를 답사해 본 바 있으나, 그 설레임은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다시 일기 시작했다. 초중고에서 선발된 27명의 학생과 인솔자를 합해 31명의 적지않은 단원이었다.

나는 사전 준비로 답사를 떠나기 전 일정표와 고구려의 역사를 다시 이해하도록 했다. 역사적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관계와 답사할 고구려 유적지에 대한 해설을 담은 안내 책자를 제작하는 정성을 기울였다. 아는만큼 보인다 하지 않았던가. 학생들로 하여금 중국과 고구려에 대한 사전 지식 습득이 이번 탐사의 성과를 가름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삼학사와 청나라 첫 수도 심양(沈陽)
 
지난 8월 27일 아침 6시45분. 인천 공항을 출발 하는가 했더니 곧바로 심양이었다. 이전엔 배를 타고 하루에 걸쳐 답사에 나선 것에 비해 너무나 미안하고 한편 고마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이곳은 봉천이라고도 불리워지는 17세기초 청나라의 수도로 궁궐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궁궐은 대제국의 위용을 자랑하느라 그 규모는 웅장하고 거대하였다. 우리나라 궁궐과는 달리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하고 목조보다는 검은 벽돌로 되어있어 이국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이곳이 조선을 침략한 침략군의 본거지였음을 상기하니 감회가 새로워졌다.

이 궁궐에서 조선국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수년간 인질로 잡혀 고생하였다는 것을 상기하니 약소민족의 아픔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했다. 또 끝까지 주전론을 주장하다 청나라에 끌려와 청의 갖은 회유에도 굴하지 않다가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삼학사의 충절, 청 태종도 삼학사의 충절에 감화되어 <삼학사비>를 세웠으나 우여곡절 끝에 현재 그 비는 발해대학에 보관하고 있다 한다.

특히 삼학사 한분인 오달제 선생은 용인 원삼출신이 아닌가. 그의 묘는 현재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있지만, 시신은 없고 선생의 혁대만으로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에 강제로 잡혀와 이곳에서 노예로 팔려간 약한 나라 백성들의 한을 생각하니 애처롭기 한이 없었다.

궁궐 안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우리말로 이와 같은 사실을 설명하니, 학생들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난 거기서 우리의 장래가 보이는 듯하였다.

거리를 둘러보았다. 지배자, 정복자의 후손들이 분명한 그들이 이 같은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우리가 물건 사주기를 고대하는 눈빛이었다. 우리가 결정권을 가진 그 순간만큼은 왠지 우리의 국력과 발전을 느낄 수 있었고 아이들처럼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아, 졸본성이여!

심양을 출발하여 환인으로 가는 도중 길가는 모두 옥수수 밭으로 이어져 있었다. 인구도 엄청나다지만, 이처럼 드넓은 초원과 들녘을 가진 중국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농촌마을은 온통 붉은 벽돌집이다. 공산주의 사회의 획일성 때문일까. 아니면 본래 부와 건강을 뜻하는 붉은 색과 노란색의 나라의 특성 때문일까, 잠시 생각하는 사이 일행은 환인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28일 아침, 주몽이 부여에서 내려와 첫 번째 수도로 정하였다는 천혜의 요새, 졸본성으로  향하였다. 졸본성에 도착하니 간판은 하나도 없었다. 오녀산성으로 불릴 뿐이었다. 오녀산성(五女山城)은 일제가 중국침략시 중국인 다섯 여자가 이곳에서 끝까지 전투하다 전사하였다 하여 붙여진 중국인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름’이란 표석과 안내판만이 있고 졸본성이란 이름이 사라져 우리를 씁쓸하게 하였다. 금방이라도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이라 표석을 바꾸고 싶어졌다. 이곳을 설명할 때 나는 오녀산성이란 이름대신 줄곧 졸본성이라 설명하며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밖에는 없었다.

역시 졸본성은 남서 쪽으로 깎아진 듯한 절벽 동쪽으로 해자의 역할을 했을듯한 비류수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두번째 수도 국내성

졸본성에서 내려와 조선족이 운영한다는 고려성에서 점심을 했다. 외국에 오면 불편하더라도 외국 냄새나는 음식을 먹어 보아야 그 나라 문화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가이드의 배려로 우리 입맞에 맞게 식단을 준비하였다 한다. 우리는 곧바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있는 집안을 향하였다. 도착하여 조선족학교 기숙사에 여정을 풀고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 저녁식사를 하는데 대접이 융숭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시도 하였지만 수줍어하며 말하지 않는다. 반찬과 밥은 내가 몸담은 학생들 식단과 비슷하였다.

계획에 의하면 조선족학교 학생들의 민속예술경연을 보기로 하였는데 원래 유명한 경연팀이라 다른 곳으로 공연을 나갔단다. 대신 인근 고구려 극장에 가서 한족들이 연출하는 고구려 연극을 보았다. 극장은 상설이라 했다. 중국인들이 동북공정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는 공연이었다.

다음 날, 아침 학교 수업광경을 보고 고구려가 전시에 사용하던 환도산성에 올라 성곽을 둘러보았다.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나 성벽의 폭은 만리장성의 폭과 비슷해 보였다. 안내표지판(유네스코에서 만듬)을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고구리’라 하였단다. 중국이 집안지역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할 때 고구리로 표기하였으나 북한에서도 평양을 신청하여 고구리라 하지 못하고 고구려라 하였다 한다.

이어서 벽화가 있는 5호 묘를 답사하였는데 벽화는 선명하지 않고 물이 줄줄 새어 관리가 아주 허술하였다. 식사 후 그리도 유명한 광개토왕비와 능을 보았다. 비에 대한 관심이 커서인지 한국인들이 줄을 이어 답사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곳이 우리 땅이 아님은 ‘호태왕비’라는 호칭에서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조선족 안내자가 설명을 유창하게 했다. 그러나 비문 내용을 일본인들이 위작하여 임나일본설을 만들어 역사 왜곡을 하였다는 내용이 없었다. 내가 나섰다. 단제 신채호 선생이 개나리 봇짐으로 고구려역사를 살리기 위해 이곳을 답사하였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이 때 이곳을 찾아온 한국인들이 내말을 듣고 박수로 화답하는 것을 보니 이곳에 우리 역사관에 입각한 안내자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이어서 장수왕릉에 가서 장수왕의 업적과 장수왕때 우리가 사는 용인이 고구려 땅이었음을 설명했다. 또 현재 용인을 구성(駒城)이라 하였으며 구성이라는 이름은 현재 구성 초, 중, 고등학교로 남아있어 용인시에서 가장 오래된 지명임을 말하니, 학생들은 의미 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장수왕릉을 답사하고 북한사람이 운영한다는 평양관에서 식사를 하는데 서비스를 하는 아가씨들은 우리들의 식사를 열심히 돕고는 <반갑습니다>와 두곡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압록강에 가 북한의 헐벗은 산을 바라보며 보트를 탔다. 갈라진 민족의 한을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백두산을 오르다

고구려인들의 기상이 깃든 집안(국내성)을 뒤로하고 열차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으로 향하였다.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한참을 밀림 속을 달리더니 백두산(안내판은 장백산) 도착하여 7인승 지프로 갈아타고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

운이 좋아 날씨가 화창하여 천지를 볼 수 있었다. 천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칼델라 호로 유명하나 그 물빛이 표현할 수없이 아름답고 봉우리마다 경이로워 가히 민족의 영산임에 손색이 없었다. 모두가 탄성이다. 천지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들로 헤아릴수 없이 많은 이들이 줄지어 오르내리건만, 저 멀리 북한 땅 봉우리는 한적하기만 하다. 빨리 통일이 되어 모두가 쉽게 성산을 참배하며 천지를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 날 백두산을 출발하여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 전적지로 향하였다. 전투 전적비는 외딴 시골마을에 초라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고 관리는 전혀 되지않았다. 탑신에 대리석 조각이 떨어져 상처투성이였다.
애처로웠다. 촌부의 무덤도 관리하는 것이 우리네 풍습인데 하물며 36년간 일제에 항거한 독립군들의 최대 전적지인데 말이다.

학생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 되나.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 몸을 실었지만, 왠지 마음은 마냥 가볍지 만은 않았다.
이종구(성지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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