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청소년과 함께 떠난 고구려역사·독립유적지 탐방기

▲ 삼사사비 앞에 모인 탐방대. 삼학사의 처형을 직접 참관한 청 태종이 그들의 충정에 감복해 삼한산두라는 칭호를 붙여줬다 한다.

드넓은 만주벌판과 그 속에 널린 고구려 유적들, 치열했던 항일 독립항쟁의 현장에서 떠올리는 여준·김혁·이홍광·오광선의 얼굴들.... 만주와 용인, 고구려와 항일투쟁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역사여행은 8월의 무더위보다 뜨겁게 우리 가슴을 담금질했다. 그런 설레임 속에 용인을 떠난 28명의 탐사단은 지난 8월 16일 중국 요녕성(遼寧省)의 성도인 심양(沈陽)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청(淸)의 첫 수도이자 중국 5대 도시인 이 곳의 버스에 오르자마자, 김장환 이사는 벌써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현지 가이드의 마이크를 잡아 끈 김이사는 이 심양 땅을 출발한 청의 20만 대군이 조선을 침범한 이후, 인조의 두 왕자(소현·봉림대군)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들을 볼모로 끌고 왔음을 역설하였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죽임을 당한 삼학사(윤집·홍익한·오달제) 얘기에 이르러서는 가느란 떨림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고구려 유적지인 환인으로 가던 버스는 신빈(新賓)현에 이르러 평정산(平頂山)유적지에 일행을 내려놓았다. 기념관에서 우릴 맞은 조선족 안내원은 이 곳이 1933년 9월경 일제에 의해 주민 3천여 명이 학살된 현장이라 설명하였다. 일제는 광산촌인 이 곳 주민들에게 추석기념 사진을 찍어준다며 한 자리에 불러 모은 후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는데, 실제 발굴현장에는 부녀자와 아이들의 유골을 비롯해 각종 생활도구들이 묻혀져 있었다. 학살배경은 항일유격대를 추적하다가 헛걸음을 하자 보복차원에서 저질렀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그 유격대 부대가 조선의 이홍광 부대일 꺼라는 안내원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 용인출신으로 알려진 이홍광 장군 흉상. 그는 동북지방 최초의 항일부대인 동북인민혁명군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과연 이 곳에서 용인출신 항일유격대 지도자인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을 만날 수 있을까. 일행은 무엇에 홀린 듯 신빈의 또 다른 평정산 기슭을 30여분 올라 항일영령기념비가 있는 곳을 찾았다. 다행이 길가에서 만난 조선족 여학생들의 안내로 찾은 기념비에는 영웅적인 항일열사들의 공적을 기린 비석과 함께 뒤편에 자리한 이홍광 장군의 흉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제수탈에 쫓겨 어린나이에 만주로 이주해 일찍이 '개잡이대'라는 항일부대를 조직해 신출귀몰 일제를 괴롭힌 그는 동북지방 최초의 항일부대인 동북인민혁명군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신빈과 반석(盤石)·유하(柳河)현 일대를 비롯해 최초로 조선국내에 진입해 일제를 깜짝 놀라게 한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전투현장에서 숨졌으며, 작년에서야 그의 돌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멀리서 찾아온 고향 후배들이 묵념을 올렸지만, 중국에서 알려진 그의 명성에 비해 우리의 대접이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을 하며 짙어진 노을빛의 산길을 내려와야 했다.

다음 답사는 환인과 집안, 통화현 등지에 널린 고구려 유적지들. 이 곳엔 약 1만2천여 개에 이르는 고구려 귀족층의 떼무덤과 2백여 개에 이르는 고구려 성곽, 그리고 5회묘를 비롯한 수많은 무덤벽화와 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등이 웅장한 민족혼을 빛내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첫 왕도인 오녀산성(五女山城)과 2대 유리왕이 세운 환도산성·국내성 등지를 돌아보면서, 일행은 현재 인기리에 방영중인 사극 《주몽》과 《연개소문》을 더욱 즐거이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2006년 8월 만주벌판의 고구려는 중국정부에 의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후 노골적인 동북공정 사업으로 인해, 마치 중국옷을 입은 조선농부처럼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관광지에서 파는 책자에 고구려를 "동북지방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소개한다든지, 조선족 가이드들조차 중국과 고구려의 무덤 또는 성곽과 생활양식이 왜 다른지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민족의 영산으로 불리는 백두산에서 조차 전혀 한글표기를 찾아볼 수 없는 현실에서 절감하게 되었다.

▲ 중국 집안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비

그럼에도 천우신조라 할까, 아님 평소 선행을 많이 쌓은 일행들 덕이라 할까. 오랜 기다림과 아찔한 지프차 등정 끝에 오른 백두산 정상에서 우리 일행은 평생 잊지 못할 장관을 만끽할 수 있었다. 2744m 고산지대에 펼쳐진 웅장한 17개 봉우리와 시리도록 푸른 천지(天池)호수, 멀리 광활한 장백산맥이 어우러진 태고의 신비함이란. 1년에 30여일 밖에 맑은 날이 없어, 주 2회씩 3년간 올랐다는 가이드나 4번씩이나 찾았다던 중국 장쩌민 주석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영산(靈山)의 장엄함을 백두의 신령들은 우리 대원들에게 마술처럼 펼쳐주시었던 것이다.

오후에 찾은 장백폭포와 천지 등반 역시 너무나 맑고 밝은 자연의 선물, 그 자체였다. 폭포를 돌아 산행 끝에 만난 천지의 맑은 물, 그 시리도록 차가운 폭포물에 발을 담그니 1시간에 걸친 험준한 고행길도 금방 옛일이 되었다.

가슴 가득 백두의 선물을 안고 찾아간 곳은 연변(延邊) 조선족차지구. 이 곳은 구한말때부터 서간도와 북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에 의해 개척된 이후 이회영·이상설과 용인 죽능리 출신의 여준 선생 등이 최초의 민족학교인 서전서숙과 신흥강습소 등을 개설하였다. 1910년대 망국에 이르러 민족지사들은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의 간성을 육성하였고, 이런 노력 끝에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의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연변대학 출신 조선족 4세인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일행은 '선구자' 노래에 나오는 그 유명한 일송정(一松停)을 멀리서 '알현'하였다. 용인합창단 단원인 남기주 이사의 선창에 따라 어린 학생들은 '일송정 푸른 솔'과 '한 줄기 해란강(海蘭江)'을 노래로 배울 수 있었다. 이어 연변지역 항일투쟁과 민족교육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한 용정(龍井)의 대성(大成)중학교. 이 곳엔 '서시'와 '별을 헤는 밤'의 민족시인 윤동주의 시비를 비롯해 용정을 빛낸 수많은 민족지사들의 활동과 이주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자세히 전시하고, 친절히 소개하는 해설사들이 있었다.

이어 일행은 밤새 만주벌판을 가르는 야간열차를 타고 마지막 답사지 심양으로 향했다. 졸린 눈을 부비며 찾은 곳은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의 치욕적인 항복을 받은 청 태조의 묘인 소릉(昭陵)과 황궁(古宮). 이 곳에서 일행은 소현세자가 9년 동안 볼모로 잡혀있다가 아담 샬 등 선교사를 통해 서구문물을 배웠던 문헌각(일명 독서당)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행선지이자 숨은 보석은 삼학사비(三學士碑)가 중수된 발해(渤海)대학교. 다행이 (사)발해대학후원회의 비서장인 김용규 선생이 직접 길안내를 자청하여 자세한 비의 내력과 의미에 대해 설명하였다. 삼학사의 처형을 직접 참관하며 이들의 충정에 감복해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칭호와 함께 비를 세워준 청 태종의 배포도 부럽지만, 1935년 잃어버린 비석의 일부를 찾아내 다시 세운 김구경 등의 노력과 다시 1965년 문화혁명 와중에  파괴되어 두 동강난 비석을 값비싼 사재를 털어 대학에 기증한 천문갑 학장의 민족애가 눈물겨웠다.

특히 우리의 눈을 끈 전시관의 한 인물은 용인 원삼면 학일리 출신인 오달제(吳達濟) 선생.  일설에 처형당할 당시 학일리 마을에 모든 풀들이 말랐다하여 고초(枯草)골의 유래가 생길 정도로 충절의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데, 그 후손 중에 오인수·오광선·오희옥 3대가문과 오의선 등 많은 독립열사가 배출된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삼학사비에 새겨진 그들의 충절과 발해대학에 심어진 민족정신을 가슴 깊은 곳에 담으며 일행은 5박6일의 대장정을 마무리하였다. 용인으로 돌아오는 일행의 몸은 지치고 피곤해 보이지만, 어느새 훌쩍 커버린 청소년들의 밝은 미소에서 모두는 행복할 수 있었다.
/대표집필 : 김명섭 용인항일독립기념사업회 이사
(용인시민신문·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주)화인투어 공동기획)

▲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첫 왕도인 오녀산성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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