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민족혼 발자취를 찾아서
제2기 용인시 소년· 소녀고구려 역사탐방기2

▲ 압록강 건너 북한땅이 보이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 낡은 한글간판 우리 민족 애환 그대로

우리 탐방대가 찾은 주요지역은 고구려유적이 집중돼 있는 통화, 집안현을 포함 두만강 유역의 훈춘, 연길, 용정 등 연변조선족자치구 일대와 압록강 일대, 그리고 백두산 천지 등이었다.

이 지역들은 과거 고구려, 북옥저, 발해 등 우리 고대사의 유적이 산재해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1900년대 초 항일운동의 숨결이 배어 있는 항일운동의 요람이다. 탐방길 내내 우리는 곳곳에서 옛 선조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고 지금도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의 삶의 애환을 통해 안타까움과 진한 동포애가 전해졌다. 또한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강 건너 북한의 마을이 아주 가까이 보이고 보트를 타고 다가갔을 때 지나가는 주민들과 서로 손을 흔들면서 단절감에 대한 낯설음과 동시에 통일에 대한 간절함이 밀려왔다. 탐방대는 우리 동포들의 삶의 현장이자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지인 중국 동북지역 만주벌판 탐사를 계기로 잃어버린 항일투쟁의 역사를 되새기고 미래역사를 열어가는 좌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윤동주 문익환등 선각자 배출

탐방의 마지막 코스인 윤동주 시비, 사립 대성중학교가 있는 용정을 찾았다.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한 용정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내 해란강 하류 충적평원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1870~80년대부터 우리동포들이 이주해 정착한 곳이다. 용두레촌 혹은 육도구라 불리며 러·일 전쟁 이후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거점이 됐다. 1907년 일제는 무장군인과 경찰병력을 이곳에 주둔시키고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했으며 1909년에는 간도협약을 체결하고 파출소를 총영사관으로 개편했다. 간도파출소는 용정중학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화재로 지금의 인민정부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용정은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민족학교가 곳곳에 세워져 민족교육의 요람이 됐다.  헤이그 밀사 이상설과 용인 출신 민족열사 여준 등에 의해 만주지역에 최초로 만들어진 서전서숙을 비롯해 동흥중학, 대성중학 등 사립학교가 세워짐으로써 3·13 만세운동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용정에서의 만세운동을 계기로 북간도 전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됐다.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 등 민족의 선각자를 배출한 옛 대성중학 건물은 현재 용정중학교 내에 역사기념관으로 복원되어 항일운동과 관련되는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그 당시 학생들의 교육활동과 체육, 동아리 활동 및 소풍 등 생활상들이 사진으로 남아 전시돼 있었고 만세시위 현장과 일제 탄압 상황들이 사진 및 그림으로 걸려 있었다. 

탐방대원들은 선각자들의 학교생활이 담긴 기념사진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교사 앞쪽에는 윤동주 시비가 있고 기념관 내에는 윤동주 기념 코너가 설립되어 그의 항일운동과 순수했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다.

대성중학기념사업회는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 시집을 판매하고 장학금 기부도 받고 있었다. 

다음으로 발길을 옮긴 곳은 익숙한 선구자 노래속의 일송정이 있는 용정의 상징인 비암산 이었다. 비암산 정상에는 정자모양의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일송정이라 불렸다고 한다.
원래 선구자의 시는 용정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를 타고 비암산에 닿아 정상의 일송정에 오르니 해란강 줄기를 끼고 도는 평야와 멀리 아래로 용주사터와 용정시가지가 내려다 보였다.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이 일송정에 올라 민족의 독립을 꿈꾸며 항일투쟁의 결의를 다졌던 기개가 느껴졌다. 탐방대원들이 다 같이 손을 잡고 둘러서서 선구자 노래를 합창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일송정 언덕에는 기념비와 선구자의 노래, 고향의 봄 등 노랫말이 새겨진 바위가 서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여성작가 강경애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 비암산 정상의 일송정
▲ 일송정에서 내려다본 해란강

# 한국말 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보기 위해 훈춘을 거쳐 이도백하를 찾았을 때는 백두산관광의 막바지 무렵이었다. 백두산은 기후관계상 연중 6월~8월 정도만 등반이 가능하고 천지 정상을 항상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맑고 청명한 날씨로 정상에 올라 장엄한 천지를 감상할 수 있었고 차가운 천지 못에 발을 담그며 정기를 흠뻑 마실 수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며 우리민족의 탯줄이기도 한 백두산을 우리 북한땅으로 밟지 못하고 중국땅을 통해 장백산이란 이름으로 오른다는 것에 대한 씁쓸함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도백하에는 백두산 관광객을 위한 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우리가 묵은 연길여관의 마음씨 좋은 주인 내외도 3개월 여관업을 주 생업으로 자녀교육과  생활을 한다고 했다. 이들 조선족들은 고국을 가고 싶어하면서도 이왕이면 상당한 여행경비를 치르는 만큼 한국에 가서 일자리를 얻어 돈도 벌어오기를 희망하고 있다.

연길여관의 조명순씨는 “우리도 남조선에 초청받아 가고 싶고 기왕이면 돈도 좀 벌어오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60~70년대의 시골과 비슷한 열악한 주거환경과 부족한 생활물자는 이들 조선족들의 궁핍한 생활로 조국 동포들과의 괴리감을 주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는 연변 조선족들에 대한 동포로서의 따뜻한 배려와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함을 절감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의 후예와 일제의 만주 이민정책에 의해 강제이주되어야 했던 뼈 아픈 상처를 가진 우리의 핏줄인 동포들이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으로부터 냉대받고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은 민족통일의 걸림돌로 해결해야 할 우선 과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탐방에 동포로서 반갑게 맞이하며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기꺼이 길 안내를 해준 조선족 남모씨(페인트업)의 최근 중국 동향에 대한 전언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에 의하면 중국은 조선족자치주를 지정함으로써 많은 혜택을 주는 소수민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시도하는 한편 한인을 만주족으로 둔갑시키면서까지 일정한 인구를 모아 만주족자치주를 조성해 이후 통일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정세에 대비한 소수민족의 이탈을 막고자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연길, 훈춘 등지에 머무는 동안 매일 저녁마다 곳곳에서 한족들이 일정한 장소에 모여 그들의 고유한 가무를 즐기며 민족공동체의 정체성을 결집하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중국은 다가오는 미래의 주변국들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대비한 동북공정의 과정을 역사왜곡만이 아니라 소수민족 정책과 자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다각도의 치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음을 실감하며 전율이 느껴졌다.

조선족들은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우리 역사에 대한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민족공동체로서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이 시급함을 통감했다.   

한 조선족은 “고구려 유적지를 찾아 많은 한국사람들이 찾아오지만 우리자신들은 사실 고구려역사나 우리 역사에 대해 잘 모른다. 후세인 우리 아이들이 한국에 대한 역사를 잘 모르는 것이 더 걱정스럽다” 고 말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헤어질 때 서투른 한국말로 통역을 하느라 애써준 조선족 남모씨는 “다음에 꼭 다시 만나요! 다음에 만날때는 한국말 더 잘할 수 있을 겁네다”라며 손을 흔들었다.   
    
차를 타고 지나며 바라보는 조선족자치구 연길, 훈춘 일대는 마치 100여 년 전에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환경이 낙후돼 있다. 정겨운 시골풍경 사이로 폐허같은 슬레이트 지붕의 가옥들, 탄광의 검은 가루들, 낡은 간판들 등. 한자 아래 한글이 함께 쓰여진 상점 간판은 우리 민족의 생활의 터전임을 확인시켜주며 이들의 변화하는 생활에 대한 우리의 몫이 분명히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너무나 가까이 보이는 북한 땅과 북한 주민들의 친숙한 얼굴은 한 민족이라는 동질감을 새삼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여서 만감이 교차하게 했다.

이번 고구려 역사탐방을 통해서 우리는 200만이 넘는 중국 국적을 가진 동포인 조선족이라 불리는 이들 동포와 북한 주민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통일을 내다보는 옛 고구려의 후예인 우리의  역할임을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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