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과 민족의 영산 백두산

▲ 장백폭포가 거대한 휴화산 밑으로 내려놓은 물줄기는 흰색 꼬리를 물고 흘러가고 있다. 자연의 신비감이 온 몸을 전율케 한다.

앞차의 꼬리를 물고 드디어 도착한 곳. 꿈에 그리던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였다. 분화구로 이루어진 연봉 사이에 짙푸른 빛을 발하며 고요히 잠든 듯한 천지. 아찔한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호수는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천지의 영스러움을 더해준다. 민족시인 고은선생은 천지를 보는 순간 엎드려 수없이 절을 올렸다지만, 필자는 얍살스럽게도 재빨리 카메라부터 빼들었다. 하늘의 장난으로 천하의 이 장면을 순식간에 놓칠 수도 있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본 장대함과 신비감을 간직한 그 곳은 백두산이 아니고 장백산이었다. 오른 곳은 장군봉이 아닌 천문봉이었다. 서 있는 그 땅은 우리 영토가 아닌 이국 땅이었다. 이를 느끼는 순간, 심사는 왠지 편치 않았다.

두산에 오르기 위해 길림성 안도현 이두백화로 향했다. 이동수단은 야간열차다.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탐사대원들은 이국적 야경에 대한 기대감으로 약간의 흥분을 느끼며 침대 칸에 올랐다. 그러나 밖으론 칠흑같은 어둠이 이어질 뿐이었다. 내달린 기차가 이두백화에 선 것은 어스름한 새벽녘. 짐만 숙소에 두고 곧바로 대기 중이던 지프에 다시 올랐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으로 향하는 그 길에 왜 설레임이 없었으랴. 제주도 어디서든 볼 수 있었던 한라산을 떠올리며, 지프 앞자리에 앉아 천지연봉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2시간 여를 달려 천지에 닿는 순간까지 오로지 눈에 들어온 것은 터널처럼 이어진 자작나무 숲과 화산석 뿐이었다.

전라북도 면적과 비슷하다는 백두산 연봉은 눈만 쳐들면 볼 수 있는 그런 산이 아니었다. 깍아지른 절벽이 이어지는 백두산 오름 길은 눈길만 돌려도 오금이 저렸지만 결코 눈을 감을수도, 뗄 수도 없었다. 이 순간 순간을 다 머리 속에 담아 두고 평생동안 풀어내야 할 것만 같았다.

▲ 천지 새김돌 앞에선 탐방대원들.
▲ 훈춘에서 동해로 빠져 나오기 위해 러시아를 통과하는 동안, 끝없는 지평선이 이어졌다. 유럽까지 이을 수 있는 횡단철도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일행 모두 양말 벗고 천지에 발 담가

앞차의 꼬리를 물고 드디어 도착한 곳. 꿈에 그리던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였다. 분화구로 이루어진 연봉 사이에 짙푸른 빛을 발하며 고요히 잠든 듯한 천지. 아찔한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호수는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천지의 영스러움을 더해준다. 민족시인 고은선생은 천지를 보는 순간 엎드려 수없이 절을 올렸다지만, 필자는 얍살스럽게도 재빨리 카메라부터 빼들었다. 하늘의 장난으로 천하의 이 장면을 순식간에 놓칠 수도 있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본 장대함과 신비감을 간직한 그 곳은 백두산이 아니고 장백산이었다. 오른 곳은 장군봉이 아닌 천문봉이었다. 서 있는 그 땅은 우리 영토가 아닌 이국 땅이었다. 이를 느끼는 순간, 심사는 왠지 편치 않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내려가긴 왠지 서운했다.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 우리 탐사대 일행은 비록 지친 몸이었지만 직접 천지에 손을 담그고, 뱃속까지 시원하게 그 물을 마셔보고 싶었다. 용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 하다고 하여 비룡폭포 라고도 하고, 그 상징성 때문에 천지폭포로 불리는 장백폭포를 거쳐 가파른 도보 장정에 나섰다. 높이 68m에 이르는 장백폭포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흩어지는 물 입자가 얼굴을 감싼다.

인간의 범접을 거부하듯 버티고 서 있는 거대한 휴화산. 깊은 골을 내며 흰색 꼬리를 달고 내려가는 폭포수 물줄기. 그야말로 자연의 신비감이 온 몸을 전율케 한다. 우리는 마침내 닿은 천지에서 내친 김에 호기까지 부려 양말을 벗고 뛰어들었다. 시릿한 기운이 발을 타고 올라 온 몸을 휘감는 것이, 잠시나마 영험한 물로 세례를 받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수 백리 떨어진 지안(集安)에 영면하고 있는 고구려 장수왕이 죽어서 머리를 향했다는 백두산. 그로부터 천수백년 후에 한민족 선대들이 집단 이주하여 ‘장백 조선족 자치현’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도백하. 우리는 이곳을 바로 떠나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조선족 동포들과 밤이 새도록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용정중 교정엔 민족지도자 사진 전시

다음날인 8월 24일 아침, 조선족 밀집지역인 연변조선족 자치주를 향해 탐사대원들은 길을 나섰다. 읍소재지 정도의 행정단위인 이도백화진 시내 모든 상점 입간판들은 버젓히 한글이 앞에 있다. 그 다음이 한자다. 용정과 연길까지 가는 서너시간 동안 한글 입간판과 초가지붕을 보면서 누대에 걸쳐 살아가는 우리 조상의 오랜 터전임을 다시금 실감했다. 그러나 길림, 흑룡강성, 요녕성 등 동북 3성의 인구 1천만명 중 조선족 인구는 고작 150만명 정도밖에 안된다고 하니,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선구자’의 노랫말에 나오는 일송정과 혜란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용정. 용드레 마을에서 기원한 용정은 조선 이주민들이 모여들어 살았던 중심지이자, 일제 시대 반일운동의 근원지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이상설과 용인출신 여준 등이 만든 민족교육의 전당 서전서숙이 있던 곳도 용정이다. 또 3.1만세운동이 벌어졌던 1919년 3월 13일, 무려 3만여명의 동포들이 참가한 반일집회가 벌어졌던 곳이다. 특히 일제 시절 용정 총인구의 39%가 학생이었고, 주택의 70~80%가 유학생들의 기숙사가 되었다고 하니, 해외 민족 교육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일행이 시내 중심부에 있는 용정중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이 같은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옛 용정 대성중학교 터에 마련된 기념관에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 학교 출신 윤동주와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숱한 민족 지도자들의 행적과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음에도 하얀 교복을 받쳐입은 학생들이 나와 악기연주를 한다. 티없이 맑고 건강한 이들의 입에서 우리말이 튀어나오는 것만으로도, 가슴으로부터 솟아나는 뿌듯함을 어찌할 수 없었다.  

용정에서 30여분만에 닿은 곳은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지, 연길이다. 아름다운 강변에 형성된 큰 도시다운 면모와 우리 눈에 익숙한 한국 대형 유통회사들의 상호가 거리감을 더욱 좁힌다. 그런 연길에도 지금 조선족 대이동의 변화를 겪고 있다. 그 하나는 한국으로의 취업행렬이다. 또 하나는 대도시로의 이주다. 이로 말미암아 무려 동북 3성에 밀집해 있는 조선족 중 20여 만명이 이주 대열에 휩쓸리고 있다. 지금 조선족 사회는 대격변을 겪고 있었다.

훈춘으로 향하던 중 도문강변에서 만난 탈북 소년, 일명 ‘꽃제비’의 눈물과 교통의 요지이자 대륙 진출 거점인 훈춘의 변화 모습. 그리고 러시아 허허벌판에 아직도 놓여져 있는 대륙으로 향하는 철도길. 이 하나 하나의 경험 또는 장면은 결코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우리가 탐사했던 고구려의 역사 흔적과 이를 둘러싼 논쟁 역시 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그나마 이런 기분을 씻어주는 것이 있었다. 러시아 자루비노항을 출발해 속초로 항하는 망망대해에서 간간히 펼쳐지는 돌고래들의 유희였다.<끝>

▲ 용정중학교 교내에 있는 대성중학교 옛터. 오른쪽 뒤로 이 학교 출신인 윤동주의 시비가 보인다.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