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도산성 국내성 광개토대왕비 곳곳서 ‘중국의 역사왜곡’

▲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수왕릉 장군총. 석실 안 석관 방향이 백두산 천지를 향해 있다고 한다.

용인시민신문-(주)화인투어 공동기획
용인시 소년·소녀와 함께 떠난 고구려 역사 탐방기 

동에서 고구려 유적이 밀집돼 있는 집안으로 가는 길은 마치 과거 추억 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간간히 드러내는 황톳길과 달리던 차를 멈추게 만드는 소 떼, 오리 떼들. 뿐만 아니라 중국 농촌 마을에서 농민들의 소박한 인심까지 만나게 되니 말이다. 

5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소도시 집안은 구시가지와 신사기지가 공존한다. 특히 지난 7월 1일 유네스코에 의해 집안 일대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집안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 현지인들의 전언이다. 특히 곳곳에 나붙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열렬히 환영한다’는 문구는 왠지 우리 민족의 유산을 가지고 자신의 것인냥 자랑하는 듯해 묘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동북공정 놓고 버스서 역사 논쟁

조선족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3일째인 8월 22일 아침부터 우리 일행은 서둘러 짐을 챙겼다. 고구려 유적 탐사의 주요 일정이 오늘에 집중돼 있었다. 첫 방문지는 집안시박물관. 1958년에 건립됐다는 이 곳에는 고구려 시대 유물 353점이 8개 진열관에 나뉘어 보관돼 있었다. 당일 둘러보아야 할 장군총, 환도산성, 적석위봉, 광개토왕비(이들은 호태왕이라 부른다) 등에 대한 예비 학습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최근 들어 절정에 달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따른 역사왜곡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거대한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 탁본이 전시돼 있는 전면 머릿돌에는 이런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高句麗 地方政權之一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 중 하나이다’라는 뜻이다. 이 같은 인식과 입장은 곳곳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집안시박물관에서 구입한 국가문물국 ‘중국문물보’발행 「중국문화 유산」2004년도 여름호에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왕성, 왕릉과 귀족 묘지는 중국 고구려 정권 집정기간(기원전 37~서기 668년)의 중요한 역사유적(集安市 高句麗王城, 王陵及貴族墓地是 中國高句麗政權執政期間 重要的 歷史遺跡)”이라고 버젓이 적고 있다. 이처럼 곳곳에서 확인된 중국의 고구려 역사왜곡 사실을 두고 한족(漢族) 출신인 여성 안내인과 코스 이동 중인 승합버스 안에서 한 바탕 역사논쟁이 붙고야 말았다.

김재영 인솔단장(화인투어 대표),·정양화 용인향토문화연구소장과 30대 초반의 여성 안내인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옆에서 듣기에도 아슬아슬할 정도였다. 특이하게도 조선족 학교를 다녔다는 그녀는 한국말을 표준어에 가깝게 구사하고 있었다.

김: 도대체 고구려가 중국 지방정권의 일부라는 주장의 근거는 뭡니까? 
안내인: 고구려와 중국이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 근거 중 하나 아닙니까? 우린 줄곧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정: 조공무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조공을 교류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서 오히려 중국에 강하게 요구한 적도 있어요.
김: 중국이 남한주도 통일추진에 대비해 북쪽에 대해 옛 영토라는 명분을 가지고 개입하려는 의도 아닙니까?
안내인:…
논쟁을 벌이는 동안 얼굴이 불거질 정도로 서로의 입장을 설득하기에 매우 열심이었지만 결과는 사실 뻔한 것이기도 했다.

먼지가 자욱이 일어나는 비포장도로를 20여분 달려 닿은 곳은 환도산성이다. 외곽으로 2.5리 정도로 떨어져 있는 환도산성은 한 눈에 봐도 주변의 자연지형과 지물을 최대한 활용한 고구려의 전형적인 고로봉식 산성이라는 것을 확인해 준다. 남쪽으로는 벌판과 하천이 있고 동,서,북 3면의 지세가 험준하고 웅장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상과 절벽, 능선과 골짜기의 선을 그대로 활용해 약한 곳은 석벽을 쌓고, 경사가 급한 곳은 흙을 쌓아 토성을 만든 것이다. 고사에 의하면 ‘서기 3년(유리왕 22)에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위치가 국내성과 인접한 그 배후의 환도산성 포함 설이 유력하다고 정양화 소장은 설명한다. 고구려 초기 평양성으로 천도하기 전 군사력이 집중됐던 요충지였다. 그답게 환도산성 주위에는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37기의 묘와 이름모를 무덤이 무려 11, 280여기나 산재돼 있어 마치 번성했던 그 당시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 고구려 유적 전시를 하고 있는 집안시 박물관. 고구려 세계문화유산 확정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펼침막 내용이 눈길을 끈다.
▲ 광개토왕비 앞에서 함께. 호태왕비란 표기와 중국식 비각이 낯설게 느껴진다.

역사조차 국력에 좌지우지 되는가

용인시 고구려 유적 탐방대가 다음으로 향한 것은 국내성. 국내성은 무려 705년이나 유지됐던 왕조국가 고구려가 졸본성(오녀산성)에 이어 장수왕 15년(427년) 평양성으로 천도하기까지 무려 400여년간 수도였다. 국내성이야 말로 만주일대를 호령하던 한민족 역사의 고도인 것이다. 현재는 그 자리에 도심이 형성돼 있어 아득한 2천여년 전 역사의 뚜렷한 흔적과 현재가 공존하는 흔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동벽 554.7미터, 서벽 664.6미터, 남벽 751.5미터, 북벽 715.2미터로서 총 둘레가 2,686미터가 되는 꽤나 큰 평지성이지만 상당부분 성벽들은 허물어져 버렸다.

어린 대원들은 성벽을 따라 걸으며 고구려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빠듯한 일정 관계로 버스에 오른 채 눈으로만 둘러봐야 하는 아쉬움을 남긴 채 장군총으로 향했다. 고구려의 옛 도읍 집안시 퉁거우에 있는 장군총은 고구려 20대왕인 장수왕릉이다. 장군총은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명성답게 그 규모가 대단했다. 가로 31.5m, 높이 13m에 달하는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데다 구릉에 위치해 있어 멀리서 봐도 단연 그 위용이 돋보인다. 안내인 설명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사신총을 비롯한 석릉과 토분 등 1만여기에 달하는 고분이 있으나 외형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는 석릉은 장군총 하나뿐이라고 한다.   

장군총에 올라 장수왕이 영면하는 널방 앞에 서서 내려다 보니 압록강이 유유히 흐르고 북녘 땅 산자락이 손에 잡힐 듯 펼쳐져 있다. 정면은 국내성을 바라보는 서남향이고 장군총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로 북동쪽에 있는 바로 백두산 천지를 향해 있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고구려의 근본이 백두산 천지로부터 시작됐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장군총이 가장 큰 석릉이라면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을 위해 세운 광개토왕비는 우리 선조가 세운 가장 큰 비석이다. 비의 높이가 무려 5.34m, 각 면 너비 1.5m에 달한다. 총 1,802자로 되어 있는 금석문에는 고구려의 건국 내력, 광개토왕 즉위 이후 정복 사업의 구체적 사실 등을 연대 순으로 담아 놓았다.

우리 민족 정체성의 근간인 고구려가 영토확장의 자랑스러웠던 전성기를 기록한 광개토왕비는 우리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비문 내용 중 일부가 일본이 4세기 한반도 남단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중국에 의해 ‘호태왕비’라고 하는 명칭과 함께 중국식 보호각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역사조차 국력에 좌우됨을 다시 한번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우리 일행은 집안에서의 유적 탐사 일정을 마치고 잠시 압록강변에 앉았다. 강 건너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뭔지 모를 야속함과 답답함이 밀려옴은 필자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지친 몸을 이끌고 우리 일행은 다시 차에 올랐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해외거주 이민사의 최대 거주지인 길림성 조선족 자치주가 다음 탐사 일정이었다. 그나마 그 곳으로 향하는 마음은 지친 몸에 비해 훨씬 가벼웠다.

▲ 고구려의 400년 도읍지 국내성과 환도산성 인근에 흩어져 있는 이름 모를 고분군. 무려 1만1,280여기에 달한다하니, 번성했던 당시가 느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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