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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한 곳’ 용인택리지 기록된 4가지 여건 두루 갖춘 명당
대대로 풍요로운 농촌, 자손 번창하는 지형
  • 이인영 프리랜서 전문기자
  • 승인 2009.03.17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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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그간 용인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재발견하며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을 쉬지 않고 진행해 왔습니다. 용인의 전설과 역사 속 인물을 발굴하는 코너를 마련하는 등 창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을 세우는데 주력하였습니다. 그 맥락을 이어 이번 호 부터는 ‘이인영의 용인 역사문화 여행’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지역 곳곳에 숨어 있는 역사의 다양한 흔적들과 문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편집자>

 

   
▲ 택리지
‘택리지(擇里志)’에 기록되기를, “사람이 살 곳을 선택할 때에는 먼저 지리(地理)를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생리(生利)를 취할 것이며, 셋째는 인심(人心)을 살핀 다음 산수(山水)를 돌아보라”고 하였다.

이 네 가지 요소 중에 한 가지만 부족해도 살기 좋은 곳이라 할 수 없는 것인 바, 지리는 아름다우나 생리가 좋지 않으면 오래 살 곳이 못되고, 생리는 좋으나 지리가 좋지 못하여도 그 또한 오래 살 곳은 못된다고 하였다. 

또 지리와 생리가 모두 합당하다 할지라도 인심이 순후하지 못하면 후회함이 있을 것이며, 주변에 아름다운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기를 수 없다고 하였으니 모름지기 ‘사람이 살 만한 곳’을 얻어 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사람이 살만한 곳의 선택에 관한 한, 우리의 조상들은 삶, 그 자체를 자연적 여건에 적응해 가면서 이에 귀의하려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 오늘의 세태와 다른 점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쨌든 지금 우리의 주변에 이러한 여건이 맞아 떨어지는 ‘살만한 곳’이 있다면 그곳은 어디이며, 과연 몇 군데나 될 것인가?  하기야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조차 갖지 못하는 우리네 입장에서 ‘살만한 곳’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일 테지만 우리의 조상들은 적어도 음기와 양기가 화합하는 지리를 얻은 다음 순후한 인심 속에서 경계의 아름다움을 벗할 곳이면, 밭을 일구고 초가삼간이라도 짓고, 주경야독하며 때로 시내에 나가 발 닦고(濯淸川), 시원한 바람 쏘이며(進凉風), 하늘 보고 땅 보아 책 받을 일 없다면, 평양감사 자리가 뭐 그리 대단 터냐 하는 얘기로 귀결이 나게 된다.

그러나 능률 위주의 생활과 편의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입장과 옛 사람들의 이와 같은 희구와는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고로 해거(海居)는 강거(江居)만 못하고, 강거는 계거(溪居)만 못하다고 하였다.  이 말은 택리지에 있는 것인데 즉, 바닷가는 염분 섞인 토질과 바람으로 살만한 곳이 못되고, 강가에는 흥망이 무상하지만, 오직 계거는 평안한 아름다움과 깨끗한 경치가 있고 관개(灌漑)와 경작하는 이익이 있다고 하였다. 또 계거는 반드시 “령(嶺)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야 평시나 난시에나 오래 살기에 알맞다”고 하였다.

어비천 청미천 일대 최고 가거(可居)지

바로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곳으로서 경기 지역에서는 유일하게도 용인의 어비천 일대와 청미천 일대가 가거(可居)지로 손꼽혔던 것으로 나타난다.《京畿卽 龍仁魚肥川 又淸美川 土沃如三南 可居 - 擇里志-》. 즉, 어비천과 청미천 일대는 땅이 비옥하고 기름지기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고, 두 곳 다 령(嶺)에서 멀지 않을 뿐 아니라 옥답을 가진 백성들은 거의 모두가 풍요한 수확을 거둬 농촌형 부를 누리고  있는 곳이었다.

요즈음 세상의 기준으로 살기 좋은 곳을 말하려면, 교육, 문화, 교통, 산업 등 제반 여건이 충족되어 있는 도시형 주거지역을 말해야겠지만, 종전에는 기름진 옥토에서 많은 수확을 거둬 즐비하게 노적가리를 쌓아 놓고 사철 땔감과 입을 옷감을 자급자족 하면서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사는 것이 농촌형 부의 척도이고 또 바램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혹 난시를 만난다 하더라도 불연이면 가까운 령, 즉 깊은 산속에 숨어서 안전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평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해두지 않으면 후회함이 있을 것이다.《安不思難敗後悔》”라는 교훈을 방편으로 삼아온 슬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연려실기술 의 ‘지리전고’나  택리지 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태백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곳에 소백산이 되고 한 줄기는 속리산이 되고 속리산의 한줄기는 서쪽으로 뻗다가 북으로 달려 거질화령이 되고 달천을 끼고 동으로 흩어져 서쪽으로 가다가 두타산 삼생산이 되며 죽산 경계에 이르러 칠장산이 된다. 칠장산은 기호경계에 우뚝 솟았고 서북으로 뻗다가 용인의 수유현(무너미고개)에서 크게 끊어져 평지(이동, 남사 일원에 곡창지대를 형성한다)가 되었다가 다시 일어나 부아산이 되고 석성산, 광교산을 일으킨다. 광교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서 화성이 되고, 서북으로 뻗어서 관악산 수리산이 되며 바다를 건너 강화부에 이른다. 예로부터 구봉산은 성을 쌓을 만하고 기호로 통하는 큰 길 한복판을 점하고 있는데 이곳으로부터 양지를 따라 동으로 달린 산세는 여주의 영능에 이르고 곧바로 양지의 서북쪽으로 가다가 남한산성이 된다.”

처인구는 자손이 번창하는 길지

용인의 산세는 석성산 축과 남한산성에 이르는 양대 축이 남북주형으로 이어졌는데 이 산세는 자좌오향, 즉 북좌남향으로 분지를 형성하면서 청미천, 한천, 진위천, 오산천 경안천, 탄천의 발원지가 된다.
그러면서 용인의 동부지역, 즉 처인구 원삼, 백암 지역은 새의 보금자리나 닭이 알을 품는 둥지와 같은 형국을 마련한다. 그래서 용인을 ‘금계포란지형’이라고 하는데 이런 곳을 말하여 대가 끊이지 않고 자손이 번창 하는 길지라고 한다.

즉, 목신리의 구봉산으로부터 이어진 산세가 북으로 길게 이어지다가 동쪽 맹리 쪽으로 돌아 높고 낮은 봉우리가 기복하고, 그 지맥이 백암에서 다시 남으로 우회하여 안성의 고삼면(본래 1960년대까지 용인 지역이었음)까지 뻗어 나면서 곡창지와 구릉지를 형성한다. 

이와 같이 형성된 지형의 안쪽은 마치 궁성이나 큰 집의 안마당에 들어선 듯 안도감을 주면서 탁 트인 넓은 들판을 형성한다.

이런 곳을 일러 회룡자좌(回龍子坐)의 지상이라 하며 서북쪽의 물이 정동으로 흘러드는 신수입진(申水入辰) 하는 곳(서출동류 하는 곳)으로써 감여가(지관)들이 일러 ‘최고의 지상’이라 손꼽는 곳이었으니, 이런 곳이라야 오래토록 세대를 이어나갈 수 있는 터이며 대대로 인물이 많이 나올 지상이라고 하였고 이런 연유로 예로부터 용인은 ‘살만한 곳’으로서 지칭되었던 것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길지의 덕택인지는 알 수 없으되 이곳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세조 때의 명신 박원형, 태종 때의 박포, 인조 때의 척화신 오달제, 영조 때의 명무 이주국, 숙종 때의 위훈공신 허적, 허체, 허선, 공조판서 조중회, 삼원삼재 중의 한 사람인 조선시대 화원 조영석, 구한말의 의병장 정주원, 오인수, 김주원 독립지사 여준, 오광선, 오희선, 국회의원 신동준, 조종익, 전 동자부장관 최창락, 제일약품 대표 한원석, 오남영 장군, 그 밖에 안막(무용가 최승희 남편) 등이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다. 이것이 풍수지리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딱히 말할 수는 없으되 그저 객쩍은 말거리는 됨직 하지 않은가? 

‘회닫이 메김소리’에 나타난 명당

동쪽으로 물을 건너 / 광주산성 되어 있고/ 그 산 낭맥 떨어져서 / 보개산이 되어있네 / 이 산줄기 벋어내려 / 서출동류로 내려와서 / 이 자리가 되었으니 / 갈마음수에 명당인가 / 장군대좌 길지인가 / 좌청룡 우백호는 / 기각으로 벌려있고 / 전대하 경안천은 / 홍천지지 근원일세 /이 자리에 묘를 쓰면 / 대대재상 나오리까 / 왕후장상 나오리까 / 묘를 쓴지 3년만에 / 종가집에 영재나니 / 한 두 살에 말을 밸 때 / 소진 장의 언변이요 / 세 네 살에 글 배우니 / 조맹덕에 필체로다 / 대대로 문장나니 / 명문거족이 이 아닌가 /

이상의 가사는 예로부터 용인지방에 내려오는 ‘회닫이 메김소리’의 일부인데 이 가사가 결코 우연한 것 같지가 않다는 말이다.
남북주형으로 달리는 용인의 산세는 이상적인 자좌오향의 명당자리를 많이 배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서출동류와 장풍득수의 음택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런 곳에 조상의 묘를 쓴 용인이씨, 해주오씨, 영일정씨, 연안이씨 등의 문벌은 용인의 사족으로서 명문세가를 이루고 있으니 조상을 잘 둔 덕택인지 묘지를 잘 쓴 덕택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인영 프리랜서 전문기자


이인영 프로필
이인영(66)씨는 용인문화원 원장, 용인시문예회관 관장을 역임했고 용인의 역사와 향토문화를 연구해 왔다. 30년간의 공직생활 이후 그는 줄곧 용인문화사를 발굴하고 연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으며 현재는 시민단체인 용인미래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 :  향토문화와 전통(용인군) 1980년
 내고장 민요 (용인문화원, 공저) 1983년
 내고장 옛이야기(용인문화원) 1985년
 내고장 용인, 지지총람(용인문화원) 1990년
 내고장 용인. 금석문 총람(용인문화원) 2000년

 

 

이인영 프리랜서 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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