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가 연극을 한다(?) 더구나 마등극을 한다면?
일반적으로 장애를 지닌 사람이 연극을 한다고 하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대단한 사람이라는 두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극단[연극사랑97]대표를 맡고 있는 김창률(37)씨가 두가지 생각을 갖게 하는 주인공.
이미 용인에서는 창단이후 뮤지커 성극[뭔가 크게 오해하셨군요] 등의 작품 연출을 통해 용인시민들에게 연극에 대한 관심과 역사, 사회문제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주는 연출가로 알려진 인물.

그런 그의 연극과의 인연은 소설속에서나 있을 법한 흔치않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찾아왔다. 대학 3년때 대동제 기간 마당극을 우연히 보다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목발을 짚고 어깨춤을 추는 그 순간의 희열.
국문학도였던 그는 그동안 연극, 탈춤, 풍물은 '나'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끼'였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놀라곤 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제 자신도 믿기지 않아요"
결국 마당극과의 인연은 그를 마당극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연극인이라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대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마당극 특성상 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배운거라곤 장구 정도가 전부다. 대신 작품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졸업후에는 민족극 한마당에서 마당극을 공부하고 대학로 극단 [성좌]단원으로 연극을 시작했다.

94년 아마추어 연극팀 [꿈을 지키는 바보들]을 창단하기까지 5년여간 이론과 경험을 쌓은 덕분에 94년 첫 데뷔작 극단 우리극장의 [바디페인팅]이 대흥행을 기록하며 언론과 대학로에서 한때 집중조명을 받기도 했다. 물론 장애라는 것도 함께.
[꿈을...] 단원들과 제15회 근로자연극제 처녀출전에 금상과 여자연기자상을 받는 행운에 이어 96년 제 17회 근로자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는 등 연출자로 화려한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화려함 뒤에는 힘들고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용인에서 극단 [연극사랑97]을 창단하고 매년 3편이상 공연을 올리며 연극에의 꿈을 가꾸는 동안 변변한 연습실이 없어 애를 태웠고 공연을 올리기 위해서는 단원들의 희생이 다소 따랐다.
"힘들고 고된 생활속에서도 묵묵히 참아온 단원들에게 가장 고맙지요. 미안하기도 하구요. 이제는 희망을 노래해야겠지요"
그에게서 절말이라는 단어는 있을 수 없다. 소아마지로 살아온 37년도, 37세 노총각이라는 것은 다소 흠이 될 수 있어도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김씨는 몸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는 용인만의 색깔을 지닌 용인이야기를 쓸 차례라 말한다. 훗날 가정을 이루며 단원들과 함께했던 고단한 삶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으리라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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