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玄燦鳳 : 1861~1918)

▲ 군수현찬봉공적비

현찬봉은 1900년대 초에 용인군수를 지낸 인물이다. 비록 용인에서 군수를 지낸 기간이 4년여에 불과하나 유래없는 선정(善政)으로 청사에 이름이 올랐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고 곳곳에 송덕비가 섰으나 불과 100년이 지나지 않아 아는 이가 없게 되었다. 특별히 용인의 역사인물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공적비와 선정비

비(碑)는 역사적 사실이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돌이나 쇠붙이, 나무 따위에 글을 새겨 세우는 것을 말한다. 비는 비석(碑石)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목비(木碑)는 재료의 보존성이 약해 영구적이지 못하고 철비(鐵碑)는 만들기 어려워 그 예가 많지 않다. 따라서 가장 흔한 것이 석비이다.

우리가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비석은 묘소(墓所)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무덤은 주로 산에 있기 때문에 일상에서 가장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비석은 공적비(功績碑)라고 할 것이다. 주로 용인이나 양지의 고을 수령(守令)을 지낸 이들의 비에는 선정비(善政碑)니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니 하는 이름이 붙는다.

백성을 아끼는 정치를 아주 잘 했다는 말이고 또 그 공적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뜻이다. 요즈음에는 공적비나 공덕비(功德碑)라는 표현이 많다. 공적과 공덕은 다른 말이기는 하지만 크게 보아 같은 뜻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공적비에는 주인공의 공적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런 표식도 없이 세운 연대만 쓰기도 한다. 또 몇 글자로 간략하게 공적을 적기도 한다. 따라서 세월이 흐르면서 주인공의 공적이 잊혀지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 초현마을 입구에 있는 「현찬봉선정비」가 그 예이다.

1902년부터 4년간 재임

초현마을 길가에는 스텐리스 철책 안에 선정비가 서있다. 비석은 네모난 화강석 바탕위에 화강석으로 만들어 세웠으며 윗부분이 둥글게 처리된 형태이다. 앞면에는 세로로 「郡守玄公燦鳳 善政碑」라고 새겨져 있다. 왼쪽에 「乙巳一月 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는데 서기로는 1905년이다. 이때는 현 군수가 용인군수로 재임하고 있을 때이다.

이후 불행히도 공적비가 동강난 것을 다시 붙여 놓았는데 이음매가 매끈하지 않아 보기가 좋지 않다. 이 비는 본래 건너편에 있었는데 마을앞을 지나는 45번 국도를 확장할 때 옮겨 세운 것이다. 주민들의 말을 빌면 도로공사 중 멸실될 위기에 처한 것을 공사업자에게 항의하여 겨우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선정비가 세워진 경위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하나도 없다.

현찬봉은 수륜원주사를 지낸 직후부터 곤양군수로 전보될 때까지 용인군수를 지냈다. 대한제국시대의 관보나 황성신문, 매일신보 등의 기사를 참조하면 군수로 재임할 때 크게 선치(善治)한 것으로 나타난다.

1906년 2월 3일자에 매일신보에는 민재호를 비롯한 용인의 사민(士民)들이 광고를 실어 현군수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우고자 한다는 기사가 있다. 또 같은 신문 4월 28일 보도를 보면 '용인군수 현찬봉은 자신의 재산으로 빈민을 구휼하며 요민(饒民)에게도 이들을 돕도록 권고하여 빈잔지호(貧殘之戶)가 환산(渙散)을 면하게 하고, 관민이 합심하여 집도하도록 하여 적경(賊警)이 하나도 없도록 하고, 향학을 권하여 점차 민식(民識)이 발달하고, 결전을 걷는 데에도 불편함과 번잡함이 없어 건납(愆納)할 우려가 없도록 하는 등 공적이 많았는데 이번에 체임이 되어 돌아가게 되어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한다고 하다.'는 기사가 보인다.

▲ 황성신문

또 1906년 5월 2일자 황성신문에도 용인 백성들이 현군수의 이임에 즈음하여 선치현정(善治賢政)을 내부(內部)에 청원한 기록이 있다. 또 7월 10일의 기사에는 곤양군민의 고백을 빌어 용인군수 4년 동안에 ‘사람마다 칭송이요 거리마다 목비로다’라는 찬사를 받았음을 알리고 있다. 1908년 3월 5일자 기사에는 곤양군민들이 현군수의 치적을 낱낱이 열거하며 한 나라의 흥륭이며 한 고을의 영광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용인의 경우처럼 곤양군(현:경남 사천시 곤양면)에도 목비가 섰음은 물론이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

현찬봉은 철종 때 태어난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연주(延州)이며 자는 문가(文可)이다. 호는 남강(南岡)으로 아버지는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지낸 성관(聖寬)이며 어머니는 아산장씨(牙山蔣氏)로 학로(學魯)의 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세에 이미 시를 지었으며 의서(醫書)에도 통달했다. 1902년 수륜원주사(水輪院主事)로 임명된 뒤 태의원전의(太醫院典醫)와 승의랑(承議郞)을 역임하였다. 용인군수로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어 불망각(不忘閣)이 세워지고, 그의 공덕을 찬양한 〈만인산송 萬人傘頌〉이 만들어졌으며, 치적을 기록한 목비(木碑)가 39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여러 기록을 참고하면 1902년 수륜원주사를 지낸뒤 부임하여 4년 남짓 용인군수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또 1905년 8월 2일 자 황성신문을 보면 경기도의 지방관의 치적이 기록되어 있다. 현 군수에 대해서는 '근검하고 조리가 있으며 송사를 들으면 반드시 명확함을 따랐으며 백성들이 모두 원한다.' 고하여 상(上) 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 군수는 1906년 10월 17일 곤양군수(昆陽郡守)로 전보되었다가 1908년 12월 6일 군수직을 사임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영천으로 낙향한다. 이때 귀래정(歸來亭)을 지었는데 이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전원으로 돌아갔던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도연명이 전원에 묻혔던 것처럼 선생 또한 고결한 은사(隱士)의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선생은 『남강집(南岡集)』 4권을 남겼다. 남강집은 1938년 아들인 재후(載厚)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간행당시 일경(日警)에 의해 발간금지를 당한 기록이 보인다. 경찰기록에 의하면 출판법에 의거 안녕금지(安寧禁止)로 『남명유고』가 올라있다. 이유는 을사조약을 전후의 반대소문(疏文)과 당시 분사(憤死)한 이들에 대한 조제문(弔祭文) 등을 수록했기 때문으로 선생의 강직한 인품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집을 보면 용인에 묘가 있는 이한응열사와 민충정공에 대한 제문이 있다. 이는 군수 재임시절에 제례를 올리면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종황제가 이한응열사의 장례시 용인군수에게 대신 치제(致祭)를 올리게 했는데 당시에 군수를 지냈던 것이다.

더하여 송병선(宋秉璿) 최익현(崔益鉉) 등 순국충혼에 올린 제문도 있고 기타 상소문과 서간문 등에 우국충정의 심원함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한 출판금지의 사유가 분명히 나타나는 대목이며 선생의 인품과 절의가 잘 드러나는 일이라 하겠다.

목비와 만인산송(萬人傘頌)과 불망각(不忘閣)

만인산은 왕조시대에나 들을 수 있던 용어의 하나이다. 지금은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찾을 수 있는 말이 되었다. 만인산은 글자그대로 만인(萬人)의 일산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만인은 단지 만 명의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현 군수는 이임할 때 지금의 이동면주민들로부터 만인산을 받았다. 선정을 베풀었다고 해도 만인산까지 받는 것은 드믄 예에 속한다. 비단으로 만들어 수를 놓아 칭송했으니 일생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또 선정을 찬송하는 목비가 곳곳에 세워졌다. 문집의 내용을 보면 어느 한곳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용인군 전체에 골고루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읍내를 비롯하여 연원, 마가실, 방축동, 성밑, 초당곡, 구흥, 갈내, 아곡, 진목리, 샘골, 신원리, 왕림 등등 39개소나 된다.

모두 현군수의 공덕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내용들이다. ‘큰 가뭄에 요행이 장마를 만난 것 같다’든지, ‘덕화를 행하여 아전과 백성들이 우러르기를 부모처럼 여긴다’든지 하는 표현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특히 활불(活佛)에 비유한 표현도 있으며 장차 목비를 금석(金石)에 새기리라는 다짐도 있다.

수많은 찬사를 이루 다 옮길 수 없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산의실에 사는 차소사(車召史)가 세운 목비이다. 소사는 과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과부인 차소사가 세운 목비에 이르기를 ‘특별히 공의 판결을 입어 원통함이 해결되고 잘못되어 가던 일이 올바로 되었네. 나를 구휼하시어 외로운 과부가 이에 힘입어 잔명을 보전케 되었네.’라고 하였다. 과부까지 목비를 세워 현 군수의 밝은 덕을 찬양할 정도로 선정을 베풀었던 것이다.

불망(不忘)은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잊을 수 없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주로 조선시대의 수령방백을 지낸 관리들의 송덕비에 자주 등장하며 영세불망(永世不忘)이라는 표현이 많다. 즉 영원토록 잊지 않겠다는 말인 것이다.

용인의 치소(治所)는 본래 기흥구 언남동에 있었다. 언남동에 용인향교가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남강집』을 보면 읍내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번화한 길의 북쪽편에 불망각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어느 고장을 가나 고을 입구에 선정비가 없는 고장이 없다. 용인도 기흥구 마북동과 처인구 양지면에 선정비가 줄지어 서있다. 과거에 용인과 양지가 각각 독립된 고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름 석 자가 분명하게 남아있는 역대 선정비의 주인공들이 재임시에 이룬 애민선정에 대한 결과였을 것이다.

현 군수가 용인에서 받은 만인산과 불망각도 선정에 대한 분명한 보답이다. 더구나 용인 관내 39개소나 선정을 칭송하는 목비가 선 것은 유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지고 사회여건도 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민주시대가 되었어도 시민을 받들고 시민에게 봉사하는 애민(愛民)의 정신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469호에 계속)

/ 용인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참고> 경기도사자료집 한말편 Ⅱ, 수록 매일신보기사인용 2002 경기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인물편, 황성신문기사
<증언> 현영복(68) 경북 영천시거주 증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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