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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자인자(農者忍者)

‘고사성어’에도 없는 이 제목의 한자를 고명한 한학자가 보면 적잖이 황당해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투른 솜씨로 인터넷을 뒤지다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우리나라 말씨에 황당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이 말을 쓰는 것은 나름대로 느낀 바를 적절히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한문권의 잔재가 아닌지.

어제 두 골 남은 고구마를 모두 캤다. 올봄에 부잣집 마당 평수만도 못하는 뒷마당 텃밭에 고구마를 심어봤다. 시골로 내려 온지도 강산이 변했는데 나는 아직도 커닝농사를 짓고 있다. 밤고구마와 호박고구마를 반반씩 다섯 골을 심었다. 5월 중순에 고구마 순을 꽂을 때 이웃 농사꾼 선배가

“이보시게, 아우님! 이렇게 심어놓으면 9월이나 되어야 캘 수 있을 거니까 잊어버리고 있게나.”

장장 4개월이나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한 달도 못되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뿌리도 없는 고구마줄기가 땅속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서 아무도 나오지 않을 때 밭 한쪽 귀퉁이를 가만히 파보았다. 겨우 잎이 조금 나왔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잔뿌리도 제대로 안 생긴 고구마 순이 손쉽게 쑥 뽑혔다.

나는 누가 볼까봐 얼른 흙을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마음을 비우고 잎이 뻗어 나는 것을 낙으로 얌전히 지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8월 초순이 되어 고구마 잎이 무성하게 밭을 덮으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대낮인데도 아랑 곳 없이 호미와 소쿠리를 들고 용감하게 밭으로 나가 비닐을 비집고 파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이웃 할아버지가

“아이고! 뭣 하는가? 고구마는 비료 주는 게 아닌데…”

“네- 비료 주는 것이 아니라 고구마가 달렸나 캐 보려고요.”

“잉!? 캔다고? 벌써? 진득하게 기다려야지. 고구마 순이 무슨 엿가락인가? 땅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늘어나게. 농사란 다 때가 있는 법이야 기다려야하네. 사람의 조화로 무엇이 된담? 하늘의 이치에 따라야지 에헴.”

그래도 나는 캐봤다. 아니나 다를까 손가락만한 고구마 새끼가 다닥다닥 달린 줄기가 나왔다.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학문도 이상도 철학도 아무것도 알바 없는 오로지 평생을 흙과 더불어 정직하게 참고 기다리며 하늘의 뜻만 바라보고 살아온 촌로(村老)의 그 한마디가 대자연의 진리이며 철학이라는 것을.

9월로 들어서니 고구마는 날로 다르게 흙속에서 살이 쪘다. 재미가 나서 야금야금 캐 먹을 때마다 그 할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속 깊이 새기고, 나의 오만함을 회개하며 대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이 풍요로운 가을을 만끽하며 감사한다.

한수남 시민기자  hsn43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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