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종 시민기자(포토칼럼니스트·수필가)
어제 친구를 만났다. 10년 만에 만났으니 서로 부둥켜안을 만도 했다. 하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영계(靈界)라는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어 말 한마디 주고받음이 없었다.

그가 이곳   공원 xx공구의 남향 양지쪽에 영생의 터를 잡은 것이 92년 이른 봄이었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고 작별할 때 우리는 한없는 아쉬움을 남기고 왔었는데, 그 뒤로 일부러 아니면 찾을 짬도 없었다. 우연찮게 우리의 매장문화에 대하여 글 쓸 기회가 있어 이 친구 생각이 나서 이곳 높다란 산등성이에 잠든 그와 주변 납골묘의 사정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60만평이라는 큰 산 하나를 몽땅 안은 너른 묘역이 오색 조화(造花)의 꽃 단지가 되어 있었다. 연이은 장의차 행렬, 상복에 소복입은 여인들의 구슬픈 곡소리가 이골 저 골짜기에서 들려 왔다. ‘의학 발달로 인명이 연장되었다고 하던데…’하고 독백도 해보았다. 매스컴에서 해마다 20여 만기 여의도 넓이의 묘지가 생긴다고 하나 심각성을 오늘에야 실감케 되었다.

잘 아는 바처럼 우리는 60년대까지 종래의 방식대로 매장을 해와 묘지가 점점 국토를 잠식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다가 7,80년대에는 서양 묘지의 공원화 제도가 도입돼 화장제도가 일부에서 행해졌으나 이상론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은 화장시설과 납골묘, 납골당의 등장으로 대변된다. 화장 수요 인구의 급증은 화장시설의 확충을 갈망케 되었으나 ‘님비’현상으로 전국 여기저기에서 제동이 걸려 시급히 해결해야 할 정책적인 현안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다행히 화장을 마친 시신은 납골당이나 납골묘에 안장되나 여기서도 문제는 산적되어 있다.

거대한 돌 구조물의 양산은 또 다른 자연 파괴로 이어졌다. 일부 납골당은 영세성을 면치 못해 항온과 항습시설이 취약해 참배 시 퀴퀴한 냄새, 구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 거미줄 및 온갖 벌레들의 극성은 고인의 영면을 방해하는 불효를 가져왔고 관리 부실은 흉물스런 혐오물로 남게 했다. 납골묘는 화병, 상석, 망두석, 묘의 테두리 등을 조성키 위한 석재의 마구잡이 채취로 산림 훼손은 물론, 잔여 석재의 방치로 산야나 주택가 석재공장에서 남은 부스러기를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하수도를 막는 악재가 되고 있음을 매일 보고 겪는 일이다. 과문인지 모르나 지난 5월 어느 날인가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 공포 시행되면서 매장제도는 다시 한 번 변신하기 시작했으니 우리가 차츰 선호하는 수목장이다.

2004년 9월 고려대 농대 김장수 교수는 평소 “죽어서 나무로 돌아가겠다”고 한 고인의 뜻에 따라, 고려대 농대 연습림 안에 있는 참나무 밑에 작은 나무상자에 고인의 유골을 넣고 ‘김장수 할아버지 나무’라는 작은 푯말 하나를 달아 놓았을 뿐 봉분도 묘비도 없이 다시 흙으로 덮는 수목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물론 수목장은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이미 성행했다고 하나 수목장이야 말로 얼마나 간편하고 엄숙하고 심오한 철학적인 의미를 가진 장례의식인가.

하지만 시작단계에 벌써 “수목장은 토지 투기와 삼림 훼손의 우려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수목장림으로 쓰일 나무의 수종개량에 따른 무모한 벌채로 인한 환경훼손, 상수원 오염, 마을 이미지 손상, 수목장림 조성을 둘러싼 관과 유착된 브로커의 발호 등을 경계하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필자 역시 하늘의 부름을 받을 일시는 모르나 저 남쪽 고향 선영으로 가더라도 수목장하여 흙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
최영종(포토칼럼니스트·수필가)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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