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달래려 실향민들 귀향 한자리

▲ 지난 9월 29일 가진 망향비 건립 23주년 행사에 함께한 어비울 실향민들.


사라진 어비울 마을…어제 그리고 오늘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지난 9월 마지막 일요일. 처인구 이동면 동도사 입구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주로 노인들인 이들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안부 주고받기에 바빴다.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더러는 자식, 손주와 동행한 이들도 있었다. 물로 가득찬 드넓은 이동저수지를 바라보면서 옛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마치 옛 추억의 흔적이라도 건져보려는 듯 거닐며 이리저리 눈길을 주는 이들은 바로 어비울 실향민들이었다.

「어비울영세불망미 건립 2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120여명의 실향민들은 수몰된 마을쪽을 향해 한참을 머리 숙여 선대들과 마을에 제와 예를 올린 후 식사를 곁들인 즐거운 시간을 함께 가졌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5년에 한번씩은 꼭 망향비(영세불망비) 앞에 모인다는 어비울 주민들의 사연은 어떤 것일까.

▲ 수몰되기 전 마을사진.
▲ 수몰 이후 어비울 현재 모습


경기일원에 이름 난 부자마을 ‘어비울’

어비리의 대표마을격인 어비울 마을형성사는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97년(태조 6년)에 처인현 승격 후인 고려말, 순흥안씨 안이녕(安以寧)이 낙향하여 어비천 변에 정착함으로써 어비울이 탄생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어비울은 기름지고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면서 각 성씨가 모여들기 시작, 마침내는 500 여 년의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큰 마을로까지 성장했다. 주요성씨는 안씨 외에 강릉 김씨(江陵 金氏), 청송 심씨(靑松 沈氏), 청주 정씨(淸州 鄭氏) 등이다. 

'어비울'이란 이름은 애초에 식수와 관개용수 마련을 위한 도랑 작업을 하던 중, 마른 땅에서 황금빛 붕어가 튀어 나르니, 이는 필시 좋은 징조라 하여 마을 이름을 물고기가 나르는 ‘어비촌(魚飛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왔다. 그 후 고기가 풍성하게 살찌고 살기 좋은 고장이라 하여 ‘어비촌(魚肥村)’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는데 1969년에 온 동네가 수몰되면서 어비(魚肥) 저수지가 되어 이제는 그야말로 물고기들의 천지가 되어 버렸다.  

어비울-수몰의 역사
1952년부터 1971년까지 20년의 긴 시간. 이동면 어비리에서 살았던 주민들에겐 잊을 수없는 세월이었다. 누대를 살아왔던 마을 수몰의 전 과정이 이루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에 의해 이동저수지 기초측량조사 작업이 시작된 것이 1952년 4월. 주민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맞서다 끝내 떠나고 저수지 완공에 이른 것이 1971년이다.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주민들에겐 20년이란 긴 세월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커다란 시련기였다. 특히 원어비울 사람들에겐 더욱 그랬다.

600여 년의 오랜 전통을 지녀온 어비울이라는 공동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52년, 어비울 저수지 공사 추진설이 유포되고 농지의 암거래가 성행하면서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에따라 저수지공사 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생존권적 차원에서 권력과 공권력에 맞서는 과정은 요즘이야 흔한 일이 되어 버렸지만, 당시로선 매우 이례적이고 낮선 경험이었다. 1956년 11월 경. 농지 암매매 거래가 집요하게 간단없이 이뤄지면서 전체 수용 면적의 매매가 상당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어비울 동민들은 긴급 비상회의가 소집하고 어비울 저수지 공사의 추진을 결사 저지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하여 탄생한 것이「어비울 저수지반대투쟁위원회」다. 동리 원로급이 모두 나서 결사적으로 막고 나섰다. 1963년 10월에는 당시 군사정부의 농림부장관, 경기도지사가 현지를 찾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주민 대표들은 수몰지구 주민들의 시흥군 개간지 집단이주 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현지답사를 했으나 제반 여건의 부실과 미비로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또한 이종만, 김수래, 이종찬 등 당시 젊은 층들은 저수지 공사 측과 물리적 충돌로 주거침입, 기물파손, 집단폭행 등 죄목으로 옥고를 치르는 불상사도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정부시책을 수용하고 말았다.

1964년 1월 20일, 동민대표와 기호수리조합과 수몰로 인한 피해 보상에 대한 전반적인 절충 조정안에 합의함으로써 10여 년에 걸친 기나긴 저지 투쟁의 여정의 막은 내렸다. 1967년 8월 20일, 어비울 동민들의 고별식이 마을공회당에서 있었는데, 생이별을 하는 이들은 눈물 바다를 이루고 말았다.

당시 어비울 전역에 걸쳐 농지는 450여 정보였고 마을을 떠날 당시 모든 주민 수는 2351명이었으며, 가옥 370여 호에 달했다. 가히 경기도내 최고 큰 마을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1969년 6월 침수 경고 발령과 동시에 담수가 시작된 마을은 1971년 12월에 준공과 함께 불속에 영원히 잠기고 말았다. 규모는 제방길이 600m, 높이 17,5m에 만수 면적만 약 330만㎡에 이르렀다.
             
스스로 전기를 만들어 썼던 앞선 마을
삶의 현장이자, 대대로 이어온 고향 터전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면서도 주민들은 천혜의 사시사철 풍부한 물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이른바 ‘전화사업(電化事業)’을 벌였다. 이 같은 일은 전국적으로도 드믄 경우였다.

1961년 개화된 문화농촌을 만들기 위해 주민들은 수력발전추진위원회(당시 위원장  심현옥)를 결성해 어비울 아랫거리 마을 어귀에 위치한 물레방앗간의 수차를 가동하는 수력방식이었다. 당시 이 같은 수력발전으로 생산한 전력은 100여 곳의 보안등과 80여 호 가정의 전등을 밝혔으니, 활동이 밤에도 활발하게 이루어 질 수 있었고 삶의 폭과 문화 향상은 당연했다.

 370여 호에 살았던 2, 351명에 달하는 주민들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부자마을 어비울 주민들은 대개 외지로 나갔지만 한 치라도 고향과 가까이 살고자 했던 이들은 10여 호가 모여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다. 묘봉 4리, 일명 ‘새마을’은 이렇게 형성된 마을이다.

1995년도에 조사된 실향민 거주 현황에 따르면 나머지 주민들은 서울과 인천 그리고 용인 등 수도권으로 주로 이주하였지만, 멀리는 부산과 광주 등 멀리까지 생활근거지를 옮긴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뿔뿔이 흩어진 어비울 실향민. 이들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한동안 각각의 생활터전 마련이 급선무였다. 10여년이 흐른 뒤에야 주민들은 다시 실향의 아픔을 넘어 고향을 후세에 전할 애향사업을 생각하게 됐다. 그 첫 출발이 「용어회(龍魚會)」의 창립이다.

발기총회 후 곧바로 「어비울 영세불망비 건립」사업이 발의되었고 1983년 8월 7일 어비리 뱃터(일명 변박사 농장)에서 용어회 창립총회를 가져 실향민들의 구심점을 만들어냈다. 1년 이상 걸린 이 사업은 1985년 9월 8일, 이동면 어비리 산 100-2번지 갈마지 동도사 입구에 세워졌다. 총 공사비 1백 75만원을 들인 이 비(碑)는 앞면에 ‘원어비동유적영세불망비(元魚肥洞遺跡永世不忘碑)’라고 쓰고 뒷면에는 비문을 새겼다.

이후 영세불망비의 원형보존과 훼손방지를 위해 한옥구조의 보호 비각이 2002년 5월 만들어짐으로써 매번 실향민들이 모일 구심이 완성된 것이다.  실향의 아픔을 애향의 정신으로 승화시킨 주민들의 뜻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2003년 9월 28일에는 「어비울 鄕史 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켜 어비울 역사를 길이 남기는 사업을 마무리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이제 세월이 흘러 고향 어비울을 기억하는 실향민들은 줄어가고 있다. 그래도 이들은 대대로 마음속에 영원히 마을이 살아있으리라 믿는다. 1995년 심명옥씨가 가사를 쓰고 편곡한 <애향가>가 있기 때문이다.
 
 1.동구 밖 느티나무 호수에 잠기고
   함께 놀던 옛 친구는 어디로 갔나
   토운봉에 호랑바위 너만은 알리
   (후렴) 살기 좋은 어비울을 잊지는 말-자.

 2.오백 여 년 다듬어온 옛 님은 어디로
   꿈속에서 너를 안고 헤매 보지만
   말이 없는 호수에는 물결만 출렁
   (후렴) 살기 좋은 어비울을 잊지는 말-자.

※참고자료:  「어비울」 CD , 「이동면지」 어비울 마을지 <우상표>

▲ 김창래 선생이 제공한 사진들. 처음공개되는 이 사진은 특히 현 동도사로 이전 하기전, 금단사 모습도 담고있어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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