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남 자전 에세이]나의 삶 나의 인생

곡자조합 넓은 창고에는 우리나라 해방의 북새통 속에서 인수인계가 되지 않는 소속이 불분명한 밀 가마니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래서 그곳은 쥐들의 천국이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쥐는 작은 고양이만 했다. 또 그 옆 창고에는 미처 배급을 못한 콩깻묵이 반이나 썩어서 쌓여 있었다. 한겨울 어느 날 밤 한림 어머니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한림 어머니와 작은집 이모는 모의를 했다. 청대(靑竹)를 잘라 마디 속을 도려내고 한쪽 끝을 뾰족하게 깎아서 만든 대롱과 자루를 갖고 문제의 창고로 호롱불을 들고 들어갔다.

밀 가마니에 청대의 뾰족한 쪽을 꽂고 대롱을 자루에 넣으니 밀이 재미있게 졸졸 자루 속으로 옮겨진다. 한 가마니에서 많이 빼면 표가 나니까 조금씩 여러 가마니에서 지능적으로 뺐다. 그리고는 귀퉁이에 구멍을 조금 뚫어 놓는다, 쥐구멍이다. 금새 한 자루가 된다. 한림은 기가 차고 한심스러웠으나 모친의 지론은 당당했다.

“어차피 일본군이 공출을 받아서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한 것이다, 조선정부가 질서를 찾아서 이곳까지 신경을 쓸 때쯤에는 이미 밀은 썩어서 못 먹게 되고 쥐 밥이 된 후일 것인데 어차피 쥐만 살찌우는 것보다는 사람이 살찌는 것이 국가적으로 봐서도 이득이니 죄 의식 안 가져도 된다”는 것이었다. 또 한림 모친은 이런 말도 했다.

“패전 후 참 가관이었지. 그렇게도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청렴결백을 생명처럼 강요하던 동네 일본 반장 집 창고에서 전시에 그렇게도 귀하던 숯이랑 설탕이 얼마나 쏟아져 나오는지 모두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했단다.”

그래도 한림은 승복할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던 임자 없는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한 도둑질이다. 죄 이니까. 어머니가 왜 저렇게 변했을까? 한림은 서글펐다. 한림은 어릴 때 다니던 예배당 생각을 했다.

파란 눈의 선교사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어도 마음속으로 탐을 내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했습니다’ 하고 용서를 구합시다” 하고는 설교를 했다. 지금은 주일학교이지만 일본에서는 일요학교라 불렀다.

한림은 어머니와 이모의 행동이 너무나 마음에 거슬렸다. 결국 그 밀은 그 다음 날부터 두 집의 반양식이 되었다. 밀과 콩깻묵을 물에 불려 맷돌에 갈아 쌀을 한 줌 넣고 되직하게 죽을 쑤면 훌륭한 점심 끼니가 되었다. 그것도 자주 먹으니까 아이들은 먹기 싫어했다. 또 가루를 내서 누룩을 디뎌서 몰래 밀주 집에 팔기도 했다. 선병질(腺病質) 체질인 한림 어머니는 가냘프고 약했다. 남편이 보내주는 월급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지 한림은 안타까웠다. 이렇게 답답할 때면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어느 날 빨래터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할머니 여기 혹시 예배당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 할머니는  “예배당은 와? 처이(처녀)는 예수쟁이가?”

“아입니다. 어릴 때 예배당에 간 일이 있어서...”

“그래? 옛 날에는 저 둥구나무 앞 돌 칭계(층계)를 쪽 올라가먼(가면) 꼭대기에 예배당이 있어서 종소리가 나고 했는데 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왜놈들이 예배당을 때려 뿌사버리고(부셔버리고) 목사라는 사람도 잡아 갔데이. 거기다가 일본 귀신을 모신다고 신사라 카는 절을 지어 가지고 만날 절하라고 볶아 되었다 아인가베. 아이고 몸서리나게 지랄발광을 했제. 그러다가 해방이 되이까(되니까), 요번에는 조선사람들이 또 일본귀신 신사를 때려 뿌사버리고 난리굿을 하더이 시방은 거기다가 하꼬방(판자 집)을 지어 가지고 색주가(色酒家)하고 무당이 살고 있다 카더라(하더라). 한쪽에서는 점치고 굿하고 한쪽에서는 술 팔고 몸둥아리 팔고 참 구색이 잘도 맞지. 예배당 자리가 망조가 난기라. 저-쪽 학교 근방에 예배당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잘 모르겠다”

한림은 그 말을 듣고 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일본에서도 제2차 대전이 나고 전세가 나빠지니까 당국에서 헌병들을 동원해서 교회 종을 때어내고 목사님이 잡혀가고 가족들은 추방을 당하고 예배당 문을 닫는 것을 봤는데...

한림은 어릴 때의 기억을 더듬어 예수님께 마음속으로 가만히 기도를 드려본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말하듯이 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성경 말씀도 모르고 찬송가도 한국말로는 모르지만. 단 한 가지 아는 것은 일본이고 한국이고 세상에서 예수님은 한 분뿐이고 어느 나라 말로 기도를 해도 다 알아들어 주신다는 확신이었다. 그때 선교사님이 큰 소리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 저는 아직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의 하나님 부디 어머니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하루 빨리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세요. 아-멘”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은 한결 평안했다.

고향 의령으로 온지 꼭 1년 반이 지난 어느 날 한림 아버지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왔다. 사택이 비었으니 이사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막상 떠나려니 마음이 착잡하고 아쉽기도 했다. 조국이라고 처음 나와서 짧은 기간이나마 한림에게 고향이라는 실감을 느끼게 해 준 고장이기에... 모국어를 서투른 대로 익혔고 생활의 고통과 즐거움을 체험했고, 막내 동생이 태어났으며 그 나이에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는 마음을 길렀다.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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