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李壽永 : 1911~1960) 선생

▲ 이수영선생 근영.
◆ 명문 용동중학교
용동(龍東)중학교는 용인뿐만 아니라 경기도 내에서도 최고 명문학교의 하나이다. 많은 학생들이 용인에서 양지로 통학을 할 정도이니 그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또 언제 어느 때 학력을 평가해도 경기도내에서 항상 수위에 든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초등학교 학생들이 양지일대로 주소를 옮기거나 아예 이사를 하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는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그야말로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고 할 수 있으니 자식교육에 바치는 부모들의 관심과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용동중학교는 처인구 양지면에 있다. 용동(龍東)은 용인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양지는 동쪽으로 이천시와 접경을 이루고 있고 남으로는 원삼이나 백암과 같은 농촌지역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양지 지역은 지금도 용인의 발전과는 거리가 있는 지역인데 상대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곳이 바로 용동중학교인 것이다.

용동중학교는 1952년 신생중학교로 개교한 이래 1957년 용동중학교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간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영재교육전문학교로 지정되는 등  명문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고 있다.

그러나 용동중학교의 오늘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선생님들의 헌신과 학부모들의 정성, 그리고 학생들의 노력이 함께한 결과일 것이다. 또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게 마련이니 양지 일대에 제일초등학교와 용동중학교를 비롯하여 배움의 터전을 이룩하여 후세 교육의 초석을 다진 분이 있으니 바로 이수영 선생이다.

◆ 일제하의 계몽운동
이수영 선생은 1911년 4월 20일 양지면 제일리에서 이민설(李敏卨)선생과 한사전(韓沙田) 여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일찍부터 고향의 가난한 이웃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기로 뜻을 세웠다고 하며 서울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평소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이미 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제일리에 야학(夜學)을 열어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이는 민족학교인 중앙학교의 영향과 농촌계몽운동이 활발하였던 당시의 시대조류에서도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이러한 교육에 대한 열정은 제일강습소를 시작으로 1960년 49세로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오직 교육에의 한길로 계속되기에 이른다.

제일리나 추계리, 식금리 일대는 양지면 가운데에서도 동쪽으로 떨어져 있어 어린 학생들이 양지까지 통학하기에는 거리가 멀고 눈이나 비라도 내리면 아예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또 당시 양지지역의 유일한 공립학교는 시험을 봐서 학생을 뽑는 정도였고 학비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에 이수영 선생을 필두로 박재원, 이병옥, 이병묵, 이동희, 송기헌 등이 힘을 합쳐 제일리에 학교를 세우기에 이른다.

이때 이수영 선생이 학교 부지를 희사하였고 인근의 유지들도 힘을 보탰으며 이수영 선생의 선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교사(校舍)를 짓고 제일강습소를 열어 인근의 청소년들을 모아 개교하였는데 이때가 1933년이다. 그 후 제일강습소는 1942년에 이르러 일제학원(日霽學院)이라는 사설학교로 변모하게 되면서 현재의 제일초등학교 자리로 옮겼다고 하며 학교부지는 제일리에 사는 오건영씨가 희사했다고 한다.

당시는 일제 말기로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수탈이 극심하였고 물자통제가 매우 엄하였는데 삼림벌채 또한 엄중하게 단속하였다고 한다. 이때 교사(校舍)를 지을 나무를 베었다고 하여 추진위원들에 경찰에 불려가 취조를 받고 베었던 목재는 압수당했는데 후에 모현면 파출소를 짓는데 사용하였고 유지들은 훈방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한다. 또 당시 교사는 모두 4명이었다고 하는데 학교의 운영 등에서도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인근 주민들과 학부모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으나 궁핍했던 당시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양지 지역의 유일한 사립학교였던 관계로 일제(日帝)의 탄압도 교묘했다고 하는데 아예 교과서를 공급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선생이 밤을 새워가며 철필로 등사원지를 쓰고 직접 등사판을 밀어 인쇄를 한 뒤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선생의 장남인 이종석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교사를 신축 할 때도 나무를 일일이 목수들이 톱으로 직접 켜서 지었다고 하며 네다섯 명 목수의 세끼식사는 어머니가 도맡아 해결했다고 한다. 학교를 짓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식량이 부족하여 죽을 먹기 일쑤였는데 나중에는 품삯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고 한다.

이종석 선생이 우연히 들은 아버지와 서씨 성을 가진 대목(大木)의 대화를 보면 이수영 선생이 품삯도 제대로 주지 못함을 미안해하자 목수가 말하기를 “돈 바라고 한 것 아닙니다. 죽을 먹으면서도 일하지 않았습니까.”했다고 한다. 이 한가지 만 보아도 당시 이수영 선생이나 이름 없는 목수나 얼마나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그야말로 헌신적 삶을 살았던 것에 지금도 새삼 숙연해 진다.

또 상량식을 할 때 설립자를 송종헌이라고 썼다고 하는데 송종헌은 당시 추계리에 근거가 있던 송병준의 아들이다. 송종헌은 송병준의 사후 귀족의 작위를 이어받았는데 설립자로 송종헌을 쓴 것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때 이수영 선생은 날로 더해가는 일제의 식민지동화정책에 항거하여 몰래 한글과 국사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는 꺼져가는 민족혼을 청소년들에게 심어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 학교는 광복이후 신생 대한민국의 의무교육시책에 따라 나라에 무상으로 헌납하여 지금의 제일초등학교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 또한 한글학회에서 운영했던 국어교사양성소를 수료하고 계속 교직에 헌신하게 된다.

◆ 신생학원
신생(新生)은 새로 난다는 뜻으로 광복이후 새로 태어난 신생 대한민국의 염원을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평생을 교육에 몸바치며 고향의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해오던 이수영 선생은 1951년 양지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학교가 바로 오늘의 용동중학교의 전신이다. 처음에는 제일리에서 제일초등학교의 한편을 빌려 시작하였으나 주북리 일대에서 오는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양지향교 명륜당으로 학교를 옮기게 된다.
이어 1952년에는 양지고등공민학교를 바탕으로 신생학원을 설립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자신의 사재(私財)는 물론 면민들의 많은 성원을 보태고 안상현(安商玄), 임문호(任文鎬), 임우빈(任瑀彬), 임승빈(任承彬), 이병민(李秉玟) 등의 정재(淨財)를 더해 신생중· 농업고등학교를 교명으로 개교하였다.
당시는 6.25의 전란 중이었고 곧이어 전쟁이 끝났으나 학교의 형편은 매우 열악하였다. 교실은 천막이었고 바닥은 맨땅이었으며 책상이나 비품도 보잘것 없었으나 배움에 목마른 청소년들이 무리지어 몰려들었고 학생이 적을 때는 600여명이고 많을 때는 1,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평생을 평교사로 헌신하다
이수영 선생은 제일리강습소 시절부터 신생중농업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교를 세우고 이를 양지일대의 유수한 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켰지만 언제나 평교사로 헌신하였다.

학교의 설립단계에서부터 언제나 자신의 사재를 헌납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교를 열었으니 교장이나 이사장을 맡을 수 도 있었다. 또 당시 시대상황으로 볼 때 선생의 학벌이나 신망(信望)이 교장직을 수행하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언제나 다른 분들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당시 교장으로 모신분이 안의훈(安義勳) 선생으로 평양치과전문학교를 나온 상이용사였다고 하는데 당시 추계리에 있던 송병준 별저에 있던 정양원의 원장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휴전 직후로 상이용사들로 인한 피해가 많았는데 안의훈 선생이 신망이 있어 이들을 잘 이끌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웃에 있던 인연으로 교장으로 초빙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안의훈 선생은 후에 당시 국유림이었던 현 양지골프장의 일부 부지를 신생농업고등학교의 실습림(實習林)으로 불하받는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말 그대로 새로 태어난 신생학원은 영구적인 교사(校舍)가 필요하였고, 이수영 선생은 이에 소요되는 비용을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하였으나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이에 선생은 1956년 학교를 살리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재단을 넘기어 오늘의 용동중학교가 있게 하였다.

이때 신생학원을 인수한 이가 자유당정권시절에 국방부차관을 지낸 사람으로 자기 삼촌인 강빈을 내세워 학교를 인수하게 되는데 내심은 실습림에 골프장을 세우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골프장을 다른 이에게 매각하면서 재단도 함께 넘어갔다가 다시 현 재단에 인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 용동중학교 부지는 본래 이병민씨 소유의 밭이었다고 하는데 임승빈 임우빈 안상현씨 등도 재단에 희사했던 재산이 후에 재단의 경영난으로 인해 경매처분되자 다시 자비를 들여 사들였다고 한다.
선생의 집안도 충청도에 땅이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으나 평생 육영사업에 소진하였고 자녀들이나 동생들도 거의 독학으로 공부해야 했다고 한다.
선생의 슬하에 4남 1녀를 남겼는데 장남인 종석은 동아일보 기자로 논설주간을 지냈고 삼남 종덕은 전주 코아백화점 사장을 지내는 등 모두 사회의 중추로 활약하고 있다.

▲ 이수영선생 사은비- 현재는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임시로 옮겨 놓았다.

◆ 용동중학교 울타리 밖에 사은비가 서다
1993년 10월에 동문들이 사은비를 세웠는데 선생의 문하생인 동국대학교 교수 송재운이 글을 짓고 글씨는 서예가 김충현 선생이 썼다. 그러나 선생이 평생을 바쳐 초석을 놓은 용동중학교 교정의 모퉁이조차 차지하지 못하고 교문건너 동아일렉콤에서 희사한 부지에 외로이 서 있었다. 최근의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임시로 옮겨 놓은 공장의 담 모퉁이에 서있는 선생의 사은비가 더욱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스승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른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면서 어린학생들에게 하는 교육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선생의 사은비의 마지막 구절에 보면 ‘우리는 이제 와서야 전란속에서 오히려 새 시대의 동량(棟樑)을 가꾸던 선생의 숭고한 육영의 뜻과 헌신의 원천(源泉)이 어디 있는 지를 헤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수영 선생은 평생을 고향에 헌신한 교육의 선각자요 참스승이다. 비록 49세의 짧은 생을 살았으나 제일 초등학교에서 용동중학교에 이르는 수많은 졸업생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선생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또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학교를 오가는 학생들이 이 비석에 담긴 선생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나라의 훌륭한 동량으로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이 선생의 한결같은 바람이리라.

/용인문화원 부설 용인문화연구소장

▲ 용동중학교 전경. 이수영선생이 설립했던 신생학원의 후신이다.

▲ 1943년학생들운동회광경-체조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 1932년 제일강습소 3학년학생일동-가운데가 이수영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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