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성으로 다시 태어난 내 딸, 당당하게 키우고 싶다

▲ 용인성폭력상담소 간사로 활동 중인 이모씨가 벽에 걸린 ‘아동 성폭력 추방의 날’포스터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탤런트 최진실씨가 두 자녀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꿔달라고 법원에 신청해 시선을 끈 바 있다. 방송인 김미화씨도 같은 일로 주목을 받았다.

올해부터 가족관계등록제가 시행된 이후 재혼한 여성과 이혼한 여성 등의 자녀 성변경 청구가 잇따르고 있는 현실이다.

성변경을 하는 나름의 사연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자신의 아픔을 세상 밖에 드러내야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녀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꾸며 새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한 가정폭력 피해 여성은 “생후 6~7개월 때부터 아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아이가 엄마 성으로 다시 태어난 그 기분은 형언할 수 없다”고 표현했다.
성을 바꾸고 ‘자신의 딸’로 학교에 보내는 이미영(38·가명)씨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 뜨겁게 뛰고 있었다.

 

4년여 간의 결혼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결혼생활과 동시에 시작된 남편의 언어폭력은 뱃속에 품었던 소중하고 귀한 아이에게까지 전달됐습니다.
언어폭력은 폭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참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달라지겠지.
남편의 폭력은 점점 가혹해졌습니다. 거실이 피로 물들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생후 6~7개월이었던 아기에게도 그 기억은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급기야 남편의 폭력은 아동성폭력으로까지…
한시도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참고 또 참았던 저는 배우지 못해 이렇게 사는가 보다 했습니다.  점점 무기력해졌습니다.
심한 두통으로 신경정신과를 찾았습니다. 남편이 알면 저를 미쳤다고'미친여자'라고 할 까봐 몰래 다녔습니다. 약만 먹으면 저도 모르게 잠이 몰려왔습니다.
안되는데… 그 사이 아이는 아빠에게 성폭행을 또 당했습니다.
의사에게 물었지요. 판단을 대신 내려달라고. 이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펑펑 울었습니다.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 길을 다시 찾아봤습니다.
힘들고 아팠습니다. 진술 녹화를 하는 아이가 서서 대소변을 싸고 벽에 머리를 박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그 어린 딸이 진술을 끝내고는 ‘살 것 같다’고 말합니다. 또 한번 펑펑 울었습니다. 아직도 아이는 밤에 오줌을 싸지만 많이 좋아졌습니다. 또래아이들과 함께 학교와 학원을 다니고 늘 밝게 웃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제 성을 딸 이름 앞에 붙였습니다. 이 것도 어려웠지만 이제 딸은 진정한 제 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떠올랐던 아픈 기억이 이제는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가족의 힘이 아닌가. 미소가 지어집니다.


# 시련 이겨낸 희망의 3월

혈혈단신 딸과 함께 용인으로 오게 된 이미영씨도 10여 년 전에는 아주 평범한 여성이었다. 외국에서 대학2학년까지 다니다 한국으로 들어온 이씨는 지인의 소개로 지난 99년 결혼을 했다. 남들처럼 연애하다 결혼을 했지만 남편의 고집스럽고 일방적인 성격은 신혼여행 때부터 나타났다. 언어폭력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고함을 지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는 일도 허다했다. 이씨는 실수했으려니 하고 넘어가고 또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남편은 이씨를 욕실로 끌고 들어가 머리를 욕조에 쳐박으며 폭력을 휘둘렀다. 그는 임신 2개월이었다. 

“언어폭력은 수도 없이 많았어요. 나이 차이가 8살이 나서 그런가 했죠. 아이가 태어나면 변할 것이라 믿었고 확신했어요. 부모님이나 가족들한테 알리지 못하고 혼자 생각을 정리한 거죠.”

그러나 이씨의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다. 목욕탕 사건 이후로 식구들에게 알렸지만 팔은 안으로 굽었다. 그저 참고 달래기 일쑤였다. 안 그러겠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시어머니가 뇌종양으로 돌아가신지 한 달 만에 이씨는 남편에게 맞아 거실이 피로 물들 정도였다.

“진단서 끊고 이혼을 하겠다고 했는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하더라고요. 그 때 집을 내 명의로 해주고 친정 근처로 이사 가자고 요구했어요. 그리고 다시 살았는데 다시 폭력을 행사하고 시아버지, 시누이 시댁식구들이 찾아와 빌고 또 빌고…” 마음이 약해서 다시 받아줬다는 이씨는 그렇게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딸을 향한 성폭력으로 치달았다.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씨는 밝게 웃다가도 눈시울을 붉혔다.

“아마 우리나라 최연소가 아닌가 싶어요. 축복받고 사랑받아야 할 아이인데…아기 때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생각하니까 오늘 아침에 슬퍼졌어요.”

이씨는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당시 폭력이 심해서 제지 못했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죽기 살기로 싸웠어야 했는데 그저 혼자서 긴장하며 아이만 지켰지요.” 

이씨는 그 이후 딸과 남편을 절대 같이 두지 않았다. 남편이 있으면 슈퍼도 안가고 쓰레기도 버리지 않고 샤워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매 순간을 긴장하면서 살던 이씨는 심한 두통에 시달렸고 산부인과도 수시로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아이까지 마음 놓고 키울 수 없는 환경은 이 모녀에게 위협적이었다.

“폭력에 학습화되고 무기력해진 상태였지만 한편으로는 생활이 변화하리라 기대했죠. 하지만 제가 기회를 주지 않았더라도 의심스러웠던 상황은 계속됐어요. 어느 날 잠깐 슈퍼에 다녀왔는데 느낌이 이상하더라고요. 두 부녀가 안절부절 못하는 기운이 역력했어요. 다음날 목욕시키는데 아이가 음부가 아프다고 해서 보니까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어요.”

아이는 아빠가 만졌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행동까지 해 보였다. 정말 충격이었던 이씨는 그렇게 1년을 감시하면서 살았는데 그 일은 또 한번 벌어졌다. 심한 두통으로 신경외과 치료를 받던 이씨가 약으로 깜박 잠이 든 사이 아이에겐 또 한번의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의사의 조언대로 2004년 9월,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 아이는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그렇게 이씨는 병원 앞에서 대성통곡을 한 뒤 법적 절차를 밟았다. 폭력에 대한 형사고발을 하고 이혼 소송을 준비했다.

그러나 시련은 또 찾아왔다. 아이의 친권, 양육권이 문제였다.  남편에게 유리한 상황이어서 아이의 성 폭행 문제를 언급했다. 아이는 비디오 진술 녹화를 시작하고 5차례에 걸쳐 진술을 마쳤다.
“아이가 진술하는 동안 무서웠어요. 아이도 힘드니까 머리를 벽에 갖다 박고 주먹으로 벽을 치고 밤에 오줌 싸고 서서 대소변을 보기도 했죠. 아이 입에서 나 죽여 달라는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어요.”

크리스마스전 날 남편이 친정으로 찾아온다는 말에 평화의 샘이라는 성폭력피해자쉼터로 옮겨 생활한 이씨는 법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지 알았지만 결국 남편은 불구속기소됐고 그나마 다행히 아이의 친권과 양육권은 가져올 수 있게 됐다.

다시 외국으로 떠난 이씨는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칠 때까지 다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누구보다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아동성폭행 피해 부모 교육을 받으면서 상처도 드러내고 아픔도 부딪혀 이겨내기로 결심한 이씨는 사는 기쁨 신경전신과의 방한 켠에 마련된 ‘빵과 영혼’이라는 단체에서 ‘가족의 힘’이라는 피해자 부모 모임 활동을 하면서 아이들과 같이 참여하고 있다. 이씨는 올해 가족관계등록제가 시행돼 지난 1월17일 자녀의 성변경을 신청해 지난 3월14일 법원으로부터 최종 판결을 받았다.

“너무 어려웠지만 이제는 정말 좋아요. 아이는 뱃속에서부터 폭행을 당해 왔는데. 다시 태어나게 한 기분이에요.”


#용인서 새롭게 출발!

외국생활을 접고 한국에 온 이씨는 친구를 따라 용인에 오게 됐다. 그는 빵과 영혼이라는 단체에서 활동 하면서, 피해자 가족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용인성폭력상담소 양해경 소장과 인연이 닿아 지금은 그곳에서 사무 간사 일을 보고 있다.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여성들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이다.
한부모 가정 지원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전 남편에게 노출이 될 수밖에 없지만 이씨는 새로 태어난 딸을 위해 더 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것도 힘을 키워서 이겨내려는 도전입니다. 아직까지 친부에 의한 성폭행으로 성변경이 안 되는 경우가 많지만 성 피해 엄마들의 바람이 받아들여 졌으면 좋겠습니다. 아이 이름 부를 때마다 아픈 기억이 떠오르지 않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판결이 많이 나오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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