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창리 비포장길 흙먼지 날리지만

김미화씨는 2년 전 처인구 원삼 주민들에게 “이 곳에 집을 짓고 있어 조금 있으면 원삼주민이 된다”며 원삼면민의 날 행사를 통해 전입신고를 했다. 검정색 바지에 흰 반팔티를 입고 짧은 머리를 질끈 동여맨 김씨의 모습은 ‘진짜 주민’ 같았다. 

1년이 흐른 작년에도 그랬다. 설을 맞아 시골집에 있었던 김씨는 두터운 솜바지에 티셔츠를 걸쳐 입고 음식장만을 하다 만났다. 화려한 조명을 받는 방송인의 타이틀을 무색케 할 만큼 수수했다.

김씨가 원삼면 두창리로 이사와 시골생활을 한지도 어언 1년. 며칠 전 김씨 부부는 모자를 눌러쓰고 청바지에 흙이 잔뜩 묻은 등산화를 신고 나타났다.

“아휴, 우리 집은 이런 신발 안 신으면 못 들어간다니까.”

집 앞 정원공사를 다시 하고 있던 터라 김씨 부부의 등산화는 진흙투성이였다. 그러나 시골 살이 하는 그들 부부에게 딱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거의 1년 만에 다시 만난 자리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 ‘이중생활’접고 완전히 시골로…

김씨는 매번 화제를 몰고 다닌다. 작년 이맘때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터넷 언론 기자들과의 인터뷰 사회를 맡더니 올해는 재혼 1년 만에 두 딸의 성을 바꿔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전부터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김씨는 그동안 많이 바빴다. 모델 지망생으로 알려진 큰딸과 두 딸 모두 미국 LA로 유학을 보낸 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모든 짐을 원삼 집으로 옮겼다. 진짜 시골생활이 시작된 셈이다.

남편 윤승호 교수가 지난 1년 동안 집을 지켜오다 이제 둘이 함께 살게 됐다. 매일 생방송이 아침, 저녁으로 있고 바쁜 일정이 있는 그에게 완벽한 시골 생활은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이 생활을 간절히 바래왔고 행동으로 옮기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뿐이었다.

한 시사잡지에 실린 김씨의 수필에는 “삼성에서 비자금으로 구입했다는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값이 몇 십억원이라지만 내 행복한 눈물의 값은 단 5000원이다”라며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우리 집까지 가는데 고속도로 통행료가 왕복 5000원 정도니까 좋은 공기와 자연의 혜택을 흠뻑 입고 사는 대가치고는 거저인 셈”이라고 표현해 그의 시골 생활을 짐작케 했다.


▲ 가수 홍서범씨와 절친한 덕에 김미화·윤승호 교수는 지난해 1월 인연을 맺었다. 남편은 색소폰을 불고 아내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서 느껴지듯 이들이 사는 이야기도 보통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집 찾게 ‘후조당’간판 걸어

비포장 길 위 흙먼지를 날리며 산 아래 도착하면 그의 집이 있다. 집을 못 찾는 사람이 많아 그는 ‘후조당’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집이 후져서 후조당이야.” 별 뜻 없이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그 집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

봄이면 노오란 개나리가 툭툭 터지고 가을이면 집 앞 개울가에 국화 감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 향이 오랫동안 집을 휘감는다. 진돗개 봉팔이, 춘자와 동네서 얻은 바둑이도 자연과 동화돼 조용하다. 여름에는 이마가 시릴 만큼 찬 바람이 시원하다. 에어컨은 그의 집에서 가장 쓸데없는 물건 가운데 하나다.

“에어컨을 왜 설치했지? 전혀 필요가 없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좋죠. 하하. 겨울에는 추워서 못살죠”

“내가 웬만해서 추위를 안 타는데, 이 집에서는 추워서 못 살겠어요. 작년에 기름값이 많이 나와서 심야전기로 바꿨는데도 한달에 60만원 정도 나오지.”

김씨 부부가 말을 주고받으며 사는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꺼냈다. 지금은 정원 가꾸기가 한창이다. 소나무를 옮기고 꽃나무도 심는 중이다. “알면 이렇게 안 짓죠.”

1년 넘게 집을 손수 가꿔온 윤 교수가 손사래를 친다. 잡초를 뽑고 통나무를 쪼개 땔감을 준비하고 집 앞 눈치우고…김씨는 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몸을 머슴처럼 놀려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세상의 편의를 완벽하게 누리며 산 사람들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골생활에는 ‘맛’이 있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 도착해도 조용히 부부가 맥주를 마실 만한 단골 음식점이 있으며 백암장에서 3000원짜리 장화를 사신고 마을을 활보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3일에 한번은 백암장에 가지. 1, 6일에 열리는 날이잖아.”

윤 교수는 백암 장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원삼면 이장님들도 꿰고 있었다. 

“그 나무는 좌항리 이장님한테 여쭤보지 그래요.”

한 동네 사는 마순관 전 용인예총 회장은 “동네 어르신을 보면 꼭 차에 태우고 지역사람들과도 아주 잘 어울린다”며 “전형적인 시골사람처럼 소박하고 재미있게 살고 있다”고 전했다.

“이구, 이 젖살 언제 빠지니? 손 좀 봐. 애기지 뭐. 아무 때고 놀러와.”

옆집 아저씨, 아줌마가 따로 없었다. 이들 부부에게 시골생활은 또 다른 의미의 파라다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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