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계대탐사 제 19구간 생태

▲ 건지산

멀리서 보는 건지산은 뾰족한 삼각형처럼 보인다. 언뜻 조비산을 보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산 형세를 보니 아무래도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될 듯싶다. 등산화 끈을 단단히 조이고 천천히 산이 인도하는 대로 길을 걷는다. 햇살은 따뜻한데 아직 바람은 차다. 옷깃을 여미고 천천히 산 신세를 지러 간다.

우리는 산에 가는 일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정복의 개념이 짙게 깔린 등산(登山), 동양적인 사상이 베인 입산(入山), 하지만 필자는 등산이나 입산보다는 산 신세를 지러 간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어느 산골 할머니가 산에 갈 때 이런 표현을 쓴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참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특히 우리처럼 생태조사를 다니다보면 이 말을 실감하게 된다. 산이 스스로 보여주지 않으면 우린 결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볼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당연히 산의 신세를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오늘도 산 신세 한번 제대로 지고 싶다.

▲ 익모초

야생화(풀꽃)

산 초입에서부터 여러 가지 풀꽃들과 인사를 나눈다. 이 계절에 무슨 꽃이냐 하겠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보면 참 많은 풀꽃들을 만날 수 있다. 지난 가을 수수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온 산을 수놓았던 여러 꽃들이 한겨울에도 여전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물론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겨울 산에서 만끽할 수 있는 무채색의 아름다움이 있다. 등골나물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하얀색 가시 같은 특이한 꽃이 피는 녀석은 지금은 연한 갈색의 깃털을 잔뜩 매달고 비상을 꿈꾸고 있다. 살짝 불자 ‘우와와와’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겨울 하늘을 날며 웃음을 터트린다.

양지바른 곳은 땅이 녹아 질척거리지만 산 정상부와 그늘진 능선은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채로 겨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얀 눈밭을 배경으로 노루발이 자신의 열매를 뽐내며 당당하게 서 있다. 눈 밑을 살짝 파보니 파란 잎이 보인다. 녀석은 늘푸른 풀꽃답게 겨울에도 푸른 잎을 달고 있다. 미래의 푸른빛과 과거의 흔적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녀석, 과거와 미래를 몸에 담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멋진 녀석이다.

노루발에게 마음을 뺏긴 나에게 자신의 아름다움도 봐 달라며 보채는 녀석이 있다. 은대난초다. 연두색의 넓적한 칼잎 같은 잎 사이로 기도하듯 오므린 순백의 꽃봉오리를 달고 그늘진 곳에 피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훔치던 녀석이다. 지금은 빛바랜 한지처럼 초라해 보이지만 당당히 눈밭을 배경으로 서 있는 녀석에게서 지난여름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구겨진 종이처럼 변해버린 잎 위로 당당히 자신의 기다란 열매 흔적을 내 보이고 있다.

▲ 산부추

녀석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한참 씨름했지만 도대체 그 느낌을 찍을 수가 없다. 표현될 수 있는 아름다움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다. 산부추도 특이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불꽃놀이 폭죽처럼 사방으로 퍼지듯 피는 특이한 형태의 짙은 분홍색 꽃을 피우던 녀석이다. 화려한 아름다움 뒤에 남은 쓸쓸함일까? 아니다. 지난 계절을 땀 흘려보낸 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자신에 찬 아름다움이다.

녀석은 붉은 갈색의 긴 꽃대위로 헝클어진 머리털 같은 열매를 잔뜩 달고 있다. 꽤 지저분한 모습이다. 감지 않아 떡 진 파마머리 같은 모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눈높이를 낮추고 녀석을 보면 그 속에 놀라운 아름다움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녀석의 씨앗을 본 적이 있는가? 아직 초록색을 간직한 씨앗은 자세히 보면 하나가 아니다. 세 개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붙어있다. 조그만 요정 지팡이처럼 보인다. 살짝 씨앗을 건드리자 반투명의 비닐 같은 껍질이 벗겨지고 부채 모양의 까만색 진짜 씨앗이 모습을 드러낸다. 너무 가벼워 살짝만 불어도 날아간다. 세상에, 이런 모습이 들어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 말불버섯

버섯들도 여럿 보인다. 눈에 익은 구름버섯과 치마버섯들이 보인다. 나무 아래에는 조그만 찐빵같이 생긴 버섯도 보인다. 위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살짝 건드리자 포자가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말불버섯이다. 포자가 날리는 모습 때문에 먼지버섯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먼지버섯은 동그란 찐빵 같은 모습에 불가사리날개가 달려있어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나무

아, 겨울 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움, 빛바랜 분홍이 내뿜는 거역할 수 없는 아름다움, 거기다가 살짝 말린 갈색의 잎을 배경으로 넣는 센스, 그저 빛바랜 분홍만이 아니라 지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중후한 회색과 연한 갈색, 그리고 연기에 잔뜩 그을린 고향의 굴뚝같은 색, 이 모두를 간직한 나무가 우리를 맞는다. 작살나무다. 가지가 셋으로 갈라진 모양이 작살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녀석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짙은 분홍색의 열매를 맺는다.

분홍구슬나무라고 하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런 나무다. 쪼그라든 열매 몇 개 보고 웬 호들갑이냐고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할 말은 없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 사람마다 다르니까. 하지만 빛바랜 열매 몇 개보고 같이 호들갑을 떨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좋다. 아울러 바라기는 우리 다음 세대들이 이런 아름다움을 같이 느꼈으면 좋겠다. 그런 아이들이 만드는 세상은 분명 희망찬, 살맛나는 세상일 테니까.

▲ 작살나무

땅비싸리의 갈색 꼬투리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상태다. 웬일인지 안을 열어보니 열매가 다 썩거나 채 여물지 않았다. 지난 가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현상을 볼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들, 그저 기우이길. 건지산은 높지 않지만 가파른 고갯마루를 걸어야 한다.

숨이 턱에 찰 쯤 정상이 보인다. 건지산은 다른 산에 비해 큰 나무들이 없는 게 이상하다. 산불이라도 났었는지, 어린 굴참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소나무와 쪽동백나무 등도 모두 어리다. 숲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정상에서 잠시 쉬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역시 나무들이 다 작다.

신갈나무도 떡갈나무도, 모두들 새로 자라는 어린 나무들 뿐이다. 좀 더 알아봐야겠다. 산 정상에서 지산 리조트 방면으로 길을 잡는다. 중간에 멋드러진 바위를 만난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돌 의자처럼 보인다. 언뜻 건지산에 유명한 의자바위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저게 그 바윈가, 좀 더 다가가 바위를 보니, 아, 바위가 거대한 경전처럼 보인다. 경전은 반쯤 넘겨진 상태고 그 사이에 소나무 잎들이 묘한 글씨를 이루고 있다. 비밀 문자, 산이 주는 메시지일까. 혼자 미친놈처럼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본다. 먼저 내려 간 일행이 기다릴 줄 뻔히 알지만 잠시 이런 여유를 부리는 것도 겨울 산에서 즐기는 사치가 아닐까?

기타

동물건지산에서 만난 곤충의 흔적은 용인의 여느 산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리상수리혹벌의 도깨비 방망이 같은 벌레집, 연둣빛 복주머니처럼 생긴 산누에나방의 고치, 이즈음 산에 가면 볼 수 있는 곤충의 흔적들을 역시 건지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새들도 비슷하다. 노랑턱멧새와 박새 그리고 노랑지빠귀, 특이한 녀석을 만나지는 못했다. 이상한 것은 건지산에 새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산에서 만났던 그 많은 새들이 왜 건지산엔 없는 것일까? 그 흔한 붉은머리오목눈이, 나무발발이, 쑥새를 우리가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우리가 게을러서, 그리고 간절히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 본 것이라고 믿고 싶다.

▲ 황조롱

이런 생각을 하며 차를 타고 오는데 빈 논에서 낙곡을 먹고 있는 한 무리의 흰뺨검둥오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황조롱이도.

산을 오르다 족제비의 흔적을 발견했다. 녀석은 배설물을 보통 돌 위에 싸는데 자세히 보면 하얀색 뼈 조각들과 털들이 보인다. 주로 쥐를 잡아먹고 사는 족제비가 쥐를 먹고 난 뒤에 눈 배설물이다. 근처에 족제비가 사는 게 분명했다. 이상한 배설물도 있었다. 2-3cm 정도 되는 막대처럼 생긴 갈색의 배설물인데 하얀 페인트 같은 물질이 묻어있었다.

들꿩의 배설물인 듯 했다. 들꿩이나 꿩은 특이한 배설 형태를 보이는데 갈색 막대처럼 보이는 것은 1차 배설물이고 페인트 같은 하얀 것은 요산이다. 녀석들은 맹장에서 배출되는 2차 배설물도 누는데 반액체 상태로 갈색인 것이 1차 배설물과 다르다. 우리가 본 것은 들꿩의 1차 배설물인 것 같다. 우린 흔적을 통해 건지산의 또 다른 모습을 봤다.

/글·사진 손윤한(생태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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