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이번 구간은 바위들이 유난히 많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조비산)이다 보니 여기저기에 커다란 바위들이 보인다. 바둑이라도 두면 좋을 듯싶은 평편한 바위, 칼날처럼 보이는 칼바위, 동그란 구슬바위, 구멍이 숭숭 뚫린 구멍바위, 거북이를 닮은 거북바위, 온통 두꺼비 등처럼 우툴두툴한 두꺼비바위, 크기도 모양도 가지각색인 바위를 바라보며 산에 오르는 것도 재미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생태조사팀이다 보니 바위 자체보다는 바위에 기대어 살아가는 여러 식물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산은 완연한 겨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온통 갈색과 회색이다. 곳곳에 남아있는 흰색의 눈과 더불어 산은 완연한 겨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푸름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푸른 생명이 보인다. 바위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푸른 생명들이 겨울에 더 돋보인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녀석은 솔이끼들이다. 겨울에도 푸른 기상을 뽐내는 소나무들처럼 솔이끼들도 바위 여기저기에서 맘껏 푸름을 뽐내고 있다. 갈색의 낙엽과 흰색의 눈, 그리고 푸른 솔이끼, 묘한 조화를 이루며 겨울 산을 찾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계절이 한자리에 모여 잔치마당을 벌이는 것 같다. 낙엽으로 대표되는 가을과 눈으로 대표되는 겨울, 그리고 봄의 푸름과 여름의 생명력, 바위에는 이 계절들이 공존하며 겨울 산을 수놓고 있다.

▲ 솔이끼

솔이끼뿐만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모양의 이끼들이 바위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살아가고 있다. 이끼들 사이에 지의류들도 보인다. 생태계의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지의류들이 많이 보인다. 나무 모양을 닮은 수상지의류, 잎 모양을 닮은 엽상지의류, 바위에 묻은 연둣빛 물감처럼 보이는 고착지의류, 모두들 척박한 바위라는 환경에 적응하며 다른 식물들이 자리 잡기 힘든 곳에서도 잘 살고 있다. 이끼와 지의류만 바위를 푸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보면 이끼 사이에 길쭉한 잎을 가진 독특한 모양의 식물이 보인다. 특이하게도 잎이 한 장씩이다. 버드나무 잎을 닮은 긴 잎들이 한 장씩, 한 장씩 피어 바위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다. 바로 일엽초들이다. 이름 그대로 잎이 하나인 식물이다.

▲ 일엽초

일엽초는 고사리목 고란초과의 늘 푸른(상록) 여러해살이풀이다. 한겨울에도 싱싱한 푸른 잎을 달고 무채색의 겨울 산을 푸르게 물들이는 녀석이다. 바위 여기저기에 모여서 피어있는 모습들이 특이하다. 이끼와 어울려 피어있는 녀석들은 더 멋지다. 봄의 생명력이 넘친다. 고사리들도 보인다. 고사리들은 워낙 종류가 많아 정확하게 하나하나 이름을 다 불러주기 힘들지만 다양한 모양의 고사리들이 흰 눈 사이에서 푸른 기운을 내뿜고 있다. 이미 말라버린 잎 뒷면에는 포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끼, 지의류, 일엽초, 고사리, 이들의 푸름도 기이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겨울 산에서 만날 수 있는 푸름의 백미는 단연 노루발이다. 갈색의 낙엽더미 속에서, 흰 눈 속에서 오롯이 푸른빛을 내 뿜고 있는 노루발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 어리상수리혹벌

겨울 산에서 찾은 야생화들의 흔적은 묘한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붉은빛이 도는 갈색으로 바짝 말라 바위틈에서 내년 봄을 기약하는 돌양지들이 많이 보인다. 갈색의 잎은 연륜을 느끼게 하며 앙증맞은 열매껍질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처럼 보인다. 돌콩들도 보인다. 줄기에 매달린 말라비틀어진 열매 껍질들은 겨울바람에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다. 아직 꼬투리를 터트리지 못한 열매들은 포항 바닷바람에 말라가는 과메기들처럼 그대로 말라가고 있다. 표면에 난 거친 털이 겨울임을 실감나게 한다.

▲ 미국자리공

미국자리공들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풋풋한 십대들의 아름다움도 아니고 화려한 20대의 아름다움도 아니다. 그렇다고 세련된 30대의 아름다움은 더더욱 아니다. 뭐랄까 인생의 깊은 묘미를 깨달은 사람만이 내 뿜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랄까. 바로 그런 모습으로 겨울 산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겨울 산에서는 활짝 핀 꽃이나 싱싱한 열매를 볼 순 없지만 흔적으로 남아 있는 야생화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무

때죽나무가 많이 보인다. 조그만 벙어리장갑처럼 생긴 겨울눈을 매달고 겨울을 견디고 있는 때죽나무들이 눈길 주는 곳마다 자리를 잡고 있다. 산 초입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아름드리 갈참나무들도 많이 보인다. 꽃피울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생강나무들은 바위틈에 자리 잡고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소나무   산 정상부에는 기이하게 생긴 물푸레나무들이 여러 그루 보인다. 정상부에서 자라려면 강한 바람과 싸워 이겨야 한다. 하지만 강하기만 하면 부러지기 쉬운 법, 물푸레나무가 택한 방법은 키를 낮추고 줄기를 굵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을 세우다보니 물푸레나무의 수형이 흔히 보는 모습이 아니다. 얼핏 분재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도깨비 뿔처럼 생긴 겨울눈이 아니라면 수형만으론 물푸레나무인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모습이다. 이는 떡갈나무도 만찬가지다. 녀석도 정상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키를 낮추고 몸통을 불리다 보니 묘한 모습으로 변해있다. 정상부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진달래들도 분재 같은 모습이다.

정상 바위 부분에 묘한 색의 잎을 달고 있는 덩굴이 보인다. 색은 좀 이상하지만 잎 모양으로 봐선 댕댕이덩굴이다. 하지만 잎이 유난히 작다. 보통 산 아래에서 만나는 댕댕이덩굴의 잎에 비해 크기가 반 정도 밖에 안 된다.

바위로 이루어진 척박한 정상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잎의 크기를 줄이는 전략을 쓴 것이지, 아니면 이 녀석만 그런 것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산 정상에서 만난 댕댕이덩굴은 묘한 느낌이다. 바위를 감싸고 자라고 있는 모습이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가막살나무는 아직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쪼글쪼글 건포도처럼 쪼그라들었지만 그나마 겨울 산에서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붉은빛이다. 붉은빛하면 단연 찔레다. 찔레는 이 계절에도 싱싱한 새잎과 더불어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데 눈이라도 올라치면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나무껍질이 너덜너덜 종이를 발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물박달나무도 많이 보인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나무 중 하나인 싸리나무는 납작한 열매를 잔뜩 달고 있다. 겨울이라야 부챗살처럼 퍼진 수형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노린재나무도 여럿 보인다. 고로쇠나무는 말라버린 잎으로 자신이 존재했음을 알리고 있다. 이는 음나무도 마찬가지다. 아직 노란빛이 감도는 음나무 잎이 겨울 산에 나뒹군다. 누리장나무는 겨울이 깊어 갈수록 독특한 아름다움을 내 뿜는다. 말라버린 열매는 싱싱했을 때 느낄 수 없었던 깊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새와 곤충

가장 먼저 눈에 띈 녀석은 오색딱따구리다. 나무를 쪼느라 정신이 없다. 박새와 쇠박새도 보인다. 항상 보이는 녀석들이지만 볼 때마다 반갑다. 수다쟁이 직박구리와 조잘조잘 재잘재잘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는 붉은머리오목눈이들도 보인다. 이번 구간에서 만난 새 중에 특이했던 녀석은 굴뚝새다. 우리나라 새 중에서 가장 작은 측에 속하는 굴뚝새는 바위틈이나 구멍에 둥지를 만들고 사는데 주로 계곡을 끼고 있는 곳이나 하천 주변에서 많이 봤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는 산 정상부의 인공동굴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워낙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굴뚝새가 분명했다.

▲ 쇠박새

곤충들의 흔적들도 보인다. 도롱이처럼 돌돌말린 집을 만드는 차주머니나방의 애벌레집이 보인다. 기다란 뱀 허물처럼 집을 만드는 뱀허물쌍살벌의 빈 집도 보인다. 가위로 동그랗게 오린 듯 한 잎이 보이는 것을 보니 가위벌이 살았음이 분명하다. 약간 딱딱해 보이는 스펀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라버린 껌처럼 보이기도 하는 사마귀 알집도 보인다. 어리상수리혹벌의 벌레집과 참나무혹벌의 벌레집도 보인다.

겨울 산은 자칫 생명이 멈춰 버린 산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눈여겨보면,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면, 마음을 열고 간절히 만나려고 한다면 겨울 산에서 아름다운 생명의 기운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자연은 감동하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 산에선 더욱, 자연은 감동하는 사람의 것이다.

/손윤한(생태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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