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계대탐사 삶터따라 사백리 (15)

쌍령산→ 경수산→ 원삼면 목신리 이보→벼루모퉁이→ 구봉산→ 달기봉→ 천주교 공원묘지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용인시계대종주는 겨울에 접어들며 좀 급해졌다. 혹한기가 닥치면 전문 산악인들이 아닌 이상 차질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예정된 코스보다 욕심을 낸다. 지난 14차에 이어 이번 탐사도 무려 7시간여에 달하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체력적인 한계를 호소하는 대원도 있다. 그럼에도 탐사 참여대원은 늘어났다. 이번에는 이종민 용인문화원장을 비롯해 열성대원들이 다시 합류해 대열은 긴 꼬리를 이룬다.

“이 발자국 보이죠. 이곳은 고라니들이 운동도 하고 휴식도 취하고 모래목욕도 하는 장소죠” 출발지 기점인 쌍령산으로 향하는 길에 준비운동을 했다. 그 장소가 고라니들의 놀이터라는 양춘모 식생팀장의 설명이다. 그동안 시계탐사 과정에서 멧돼지 흔적 등 야생동물 흔적을 많이 보아온 터여서 개체수의 증가와 자연의 복원이 생각보다 빠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 학일리 전경

쌍령산은 원삼면 학일리와 안성시 고삼면 쌍지리 사이에 있는 산이다. 안성시 산봉우리 두개가 마주하고 있어 쌍령산인데, 실은 용인쪽에선 그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몇 해전 안성시 쌍지리를 간 적이 있는데, 마을 뒤로 위엄있게 두 봉우리가 솟아있는 모습은 왠지 신령스럽다는 느낌마저 주는 묘한 것이었다.

그런데 용인쪽에서도 온전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문수산에서 쌍령산을 거쳐 경수산으로 이어지는 그 등줄기에서 보자니, 과연 본연의 자태가 드러났다. 다만 숲으로 우거진 틈으로 드러나는 것이어서 아쉬움은 남지만 대원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우리 일행은 그냥 지나쳤지만, 경수산에 이르기까지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한 바위가 서 있다. 감투바위, 가마바위, 족도리 바위, 말바위 등이 그것이다. 그 중 감투바위엔 이런 전설이 있다.

▲ 경수산

궁예의 용화사상 곳곳에 미륵불

오래전 구봉말에 큰 잔치가 있었다. 참석했던 구봉말 사람들과 솟점말 사람들이 산에 올라 장난 끝에 감투바위를 떠밀어 버렸다. 두 마을은 행정구역상 용인이다. 감투를 쓴 형상의 이 바위는 왠지 동네를 등지고 멀찌감치 안성 고삼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후로 이 마을 사람들 중에는 인재가 나긴 했어도 국록을 먹는 큰 감투를 가진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안성에 속한 쌍령말은 그 반대가 되었다.

간단하면서 얼게가 엉성한 이 전설은 상징성을 갖는다. 즉 바위를 해 함으로서 마을에 인물이 안나왔다는 것은 함부로 자연을 대하지 말라는 교훈이요, 그 신성성을 부여하고 자연의 영험함을 깨닫도록 하고자 함이다.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함부로 처신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동시에 단합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명산은 좋은 바위를 품고 그 바위는 수천년을 이어가며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또 바위에 이름을 지어 그에 얽힌 설화를 후대에 남기기도 한다.

쌍령산의 본래 이름은 성륜산(聖輪山)이다. ‘성륜’은 성스러운 바퀴라는 뜻으로 불교의 법륜을 뜻한다. 비로봉이나 문수산처럼 불교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대원들이 경수산 산림도로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바라본 원삼면 목신리와 죽능리 일대는 안성천 줄기를 따라 시원스레 들어온다. 경수산을 내려오며 경수사에 들러 시원한 냉수로 목을 축인 후 용인의 경계마을인 목신리 이보마을에 닿았다.

▲ 목신리

이보는 과거 우시장이 형성될 정도로 번성했던 지역이며 주소지는 용인이되 행정서비스는 안성시 보개면이 관할하는 특이한 경우이기도 하다. 과거 목악부곡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62호로 보호되고 있는 석불입상이 있다.

코가 다 마모되고 조형미조차 엉성한 이 석불을 이해하기 위해선 역사여행을 해야 한다. 원삼 일대는 유독 다른 지역에 비해 미륵신앙물과 그에 얽힌 얘기가 많다. 이는 이곳이 과거 고려조때 죽주 땅에 속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죽주에는 신라말 나라가 기울어 도적들이 창궐할 때 기훤이란 인물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곳이다. 신라의 왕자로 알려진 궁예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선종이란 법명으로 중이되었다가 잠시 그에게 몸을 맡긴 적이 있었다.

후일 미륵사상을 통치이념화해 후고구려를 세운 그는 죽주에 불국정토 용화세상의 꿈을 전파하려 애썼다는 기록이 전한다. 죽주 주민 역시 궁예를 잊지 않았고 여기저기에 미륵불을 조성하였는데, 그 영향이 바로 원삼면 일대에 널린 미륵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옛 도읍지 전설어린 구봉산

이보를 벗어난 탐사단 일행은 천주교 공원묘지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쳐 벼루모퉁이 용인시계 표지판 옆으로 산에 오른다. 구봉산으로 이어지게 되는 이 산은 경사가 심해 대원들은 한 시간여 동안 그저 묵묵히 뒷사람 발꿈치만 보고 걸을 뿐이다.

옛 전설에 도읍지 물망에까지 올랐다는 구봉산. 굽이굽이 물결치듯 듬직한 구봉산에서 달기봉을 향해 대원들은 방향을 튼다. 이쪽으론 특히 고압철선이 자주 눈에 띈다. 바람이 쌩쌩불어 옷깃을 여민 채 걷는 대원들이지만 얼추 200여 미터에 달하는 고압선에 올라 일을 하는 이들이 보인다. 문득 저렇게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일당이 얼마나 될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스친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목적지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우리가 걸었던 하루 코스가 시야에 들어온다. 깨나 먼 길이다. 얼추 험한 산길로 약 15키로미터는 걸었음직하다. 오늘은 스스로가 대견할 따름이다.

/용인시계대탐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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