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계대탐사 제 14구간 식생

갑자기 추워진 날씨, 산 입구에서부터 추위를 실감한다. 장갑과 두툼한 모자를 준비했지만 옷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바람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입구에 있는 계곡엔 벌써 얼음이 얼었다. 성급한 계곡물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튀기면서 만들어 놓은 고드름과 동그란 수정 같은 얼음덩어리들이 겨울이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가을이다. 깊은 가을이다. 파랗다 못해 눈이 시린 하늘이 아직 이 계절이 가을임을 느끼게 한다.

나무파란 캠퍼스에 회색빛 먹으로 그림을 그린다. 휙~ 먼저, 하늘로 승천하려고 몸부림치는 용의 몸뚱이를 그린다. 그리고 용이 내뿜는 열기를 가는 붓으로 그려 넣는다. 마지막으로 붉은빛이 도는 갈색으로 후광과 같은 빛살을 그려 넣는다. 이런 그림을 수도 없이 그린다. 그리고 그림을 하늘까지 닿도록 세로로 길게 세운다. 그리곤 그 밑에 앉아 위를 쳐다본다. 그 때 느끼는 맛이란….

늦가을 산에서 만나는 나무들은 이런 느낌이다. 잎을 다 떨어뜨린 나무들은 이제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동안 여러 가지로 치장했던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알몸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볼 수 있는 계절이다. 이 계절 산에 오르면 꼭 이렇게 나무를 보시길. 우선 커다란 나무를 하나 고른다. 그리고 해를 등지고 나무 아래에 선다. 자 이젠 몸을 숙이자. 아니 제대로 보려면 그 자리에 눕자. 그리고 눈을 감자.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눈을 천천히 뜬다. 그러면 거기에 파란 캠퍼스에 묵으로 그린 멋진 용을 만날 수 있다. 춤을 추는 용, 사뿐사뿐 날아가는 용, 성난 얼굴로 불을 내뿜는 용….

겨울에 나무를 알아보는 방법으론 나무껍질(수피)을 보거나 겨울눈을 보면 된다. 나무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쉽게 나무들의 특성을 알아챌 수 있다. 이번 구간엔 굴피나무가 특히 많다. 그 동안 몇 번 보긴 했지만 이번 구간에서처럼 이렇게 많은 굴피나무를 만나긴 처음이다.

▲ 굴피나무

입구에서부터 굴피나무가 보인다. 그런데 겨울눈이나 열매로 보면 굴피나무가 분명한데 두 종류의 굴피나무가 있는 것이 보인다. 하나는 회백색이 도는 매끈한 수피를 가진 녀석이고, 다른 하나는 수피가 세로로 길게 갈라져 있다. 혹 중국굴피나무인가 해서 잎을 찾아본다. 중국굴피는 잎자루에 날개가 있기 때문에 쉽게 구분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잎을 봐도 둘 다 굴피나무다. 그렇다면.

나무도 나이를 먹는다. 어렸을 때의 모습과 컸을 때의 모습이 다르다. 만약 둘 중 하나의 특징만 기억하고 있다면 우리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우리는 굴피나무의 어린 녀석과 성장한 녀석의 수피가 다르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나무도 세월과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굴피나무는 어렸을 땐 수피가 회백색으로 매끈하지만 성장하면서 수피가 점차 짙은 갈색으로 변하고 세로로 길게 갈라진다.

▲ 참죽나무열매

굴피나무와 더불어 아름드리 굴참나무도 많이 보인다. 골이 깊게 패인 수피 때문에 골참나무라고 부르다가 굴참나무가 된 녀석이다. 개살구나무, 황벽나무와 더불어 수피에 코르크가 두껍게 발달한 특이한 나무다. 온통 갈색과 회색의 산에 아직 초록을 간직하는 나무들이 몇 눈에 띈다.

조그만 신갈나무에도 잎이 나오고 있다. 연둣빛 잎이 나오다 추운 날씨 때문에 바로 갈색으로 물이 든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버린다. 이런 신갈나무가 여럿 보인다. 어찌된 일인지, 나무들이 계절을 잃어가고 있다. 송전탑이 있는 정상부는 전자파 때문에 나무들에겐 별로 좋은 환경이 못 된다. 이번 구간에도 송전탑이 지나가는 구간이 있었는데 근처에 가서 보니 호랑버들들이 겨울눈을 활짝 열고 곧 강아지 꼬리 같은 꽃을 피울 기세다. 녀석들만 보면 곧 봄이 올 것 같다.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다고 하던데, 혹시….

▲ 고욤나무

마을 근처에 멋진 나무들이 많다. 가장 우리의 관심을 많이 받은 나무는 단연 고욤나무다. 야생 감나무라고 할 수 있는 고욤나무는 감나무 대목으로 쓰이는 나무다. 어찌나 많은 고욤을 달고 있는지 가지가 축축 늘어진다. 일행 중 한 명이 맛있다며 연식 고욤을 따서 입에 가져간다. 호기심에 나도 몇 개를 주워 먹어 본다.

“으, 떫어” 고욤은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추억으로 먹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참죽나무도 예쁜 열매를 잔뜩 달고 있다. 나무 자체도 멋지지만 특이한 열매 때문에 인기가 좋은 나무다. 물론 여러 가지 쓰임새도 많은 나무다. 농촌 마을에 으레 한두 그루 있게 마련인데 이 마을에도 몇 그루가 보인다.

야생화꽃이 피어있는 들꽃은 얼어서 누렇게 변한 ‘산국’정도가 보인다. 이 계절엔 들꽃을 볼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들꽃들의 진정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가랑잎 사이에 초록의 잎이 보인다. 한겨울에도 푸른 자유를 꿈꾸는 노루발이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초록의 잎이 더 돋보이는 녀석이다. 쑥부쟁이도 보인다. 보라색 꽃잎을 다 떨어뜨리고 연한 갈색을 띤 씨앗을 바람에 곧 날릴 기세다. 쑥부쟁이가 이렇게 변하다니. 뚝갈의 모습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순백의 꽃을 떨어뜨린 자리엔 씨앗이 잔뜩 매달려있다. 씨앗을 중심으로 비행접시 같은 날개가 달려 있다. 바람 친구가 어서 멀리 보내주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 단풍취

특이한 것으로 치자면 단풍취가 단연 압권이다. 작은 회오리바람 같은 꽃이 피었던 자리에 이제는 연한 갈색의 날개가 잔득 매달려 있다. 뭐하고 닮았을까? 곱게 딴 여학생의 머리를 상상하면 된다. 어쩜 저리 정갈한 모습일까. 모범생 같은 모습으로 골짜기 구석에 수줍은 듯 달려있는 단풍취의 씨앗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비슷한 모습이지만 ‘정갈’하고는 거리가 먼,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소위 선생님들이 문제아라고 부르는, 여학생의 개성 넘친 머리 스타일을 한 씨앗을 달고 있는 들꽃도 보인다. 바로 우산나물이다. 단풍취가 곱게 딴 머리라면 우산나물은 ‘레게’머리다.

꽃은 지나가는 나그네다. 꽃이 매력적인 건 사실이지만 진정한 모습은 아니다. 들꽃들의 진정한 모습, 물론 이 또한 편견일 수 있는 이 계절에 원 없이 만날 수 있다.

▲ 쑥새

새, 곤충, 기타 동물산 입구에 있는 감나무에 직박구리가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배고픈 녀석은 연신 비명 같은 소리를 질러대며 감을 쪼아 먹고 있다. 꽤나 시끄러운 녀석이다. 오죽하면 다른 새들에게 숲에서 쫓겨났을라고.

박새들도 보인다. 그 옆엔 귀여운 쑥새 무리도 보인다. 열 댓 마리는 됨직한 쑥새들이 이러 저리 날아다니며 먹이활동에 열심이다. 푸드득~ 갑자기 꿩이 날아오른다. 산에는 먹을 것이 없는지 배추밭에서 여러 마리가 먹이를 먹다가 놀라 날아오른다. 말똥가리 한 마리가 유유히 파란 하늘을 맴도는 것이 보인다. 파란 바다에서 여유롭게 수영하는 모습이다. 저러다가 먹이가 발견되면 전속력으로 내리 꽂히겠지. 정중동(靜中動), 고요함 가운데 힘찬 움직임이 느껴지는 녀석이다.

▲ 말벌집

밤나무에 농구공만한 말벌집이 매달려있는 것이 보인다. 노봉방(露蜂房)이라는 이름으로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신라시대부터 고찰을 중심으로 그 비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약효가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어떤 문헌에는 산삼보다 더 약효가 좋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말벌들은 보통 여왕벌 한 마리에 3만 마리 정도의 일벌들이 공동체 왕국을 이루며 사는데, 겨울이 오면 금년의 여왕벌을 비롯해 모든 벌들은 죽고 오직 수벌과 교미에 성공한 예비 여왕벌만이 나무껍질 등에서 겨울잠을 잔다. 내년 봄에 세울 자신의 왕국을 꿈꾸며. 살아있는 곤충을 만나기는 힘들지만 이렇게 곤충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이 계절에 즐길 수 있는 호사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숲의 많은 식구들에겐 혹독한 시련의 계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모두들 이 계절을 잘 견디길. 그리하여 봄이 왔을 때 찬란한 꽃을 피우길, 아름다운 생명의 꽃을. 부디 잘 견디길…. 하늘이 유난히 맑은 날이다.

/글·사진 손윤한(생태활동가)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