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힘, 노년이 즐겁다

 “수첩에 빈 공간이 없는 만큼 내 삶은 재미있어”

▲ 김상원
고졸 출신이지만 화려한 학력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제철 분야에서 손꼽히는 사람으로 평가받으며 지난 8월 노동부가 선정한 ‘이달의 기능 한국인’으로 뽑혔고, 2005년에는 각 분야 최고의 장인에게 주어지는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된 포스코의 광양제철소 1열연공장장 임채식씨는 치밀한 메모 습관이 성공의 무기라고 밝혀 화제가 됐다. ‘수첩공주’라는 별칭이 붙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도 메모광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사회 지도자나 성공한 사람들은 ‘메모하는 습관’을 자신의 성공 무기로 여긴다.

한 때 잘 나가던 항공사 기장 출신인 김상원씨(73·처인구 삼가동)는 인생의 고배를 마시면서 수첩에 무엇이든 기록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기록에 비해 내용은 많이 달라졌고 수첩을 빼곡히 채워가면서 제2의 인생을 설계하면서 삶이 재미있어 졌다. ‘기록의 힘’은 그를 변화 시켰다.

#사업실패 후 ‘메모광’으로

김상원씨는 젊은 시절 공군전투비행단에서 20년 동안 군 전투기를 조종하고 1977년 12월1일 대한항공에 입사해 1996년 7월 기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잘 나가는 조종사였다. 그는 퇴임할 때까지 1만2500시간을 비행했다. 비행기만 40년을 탄 것이다.

“17년간 군에서 생활하다 중령으로 제대를 했어요. 출세할 길이 없어 대한항공을 선택했던 거죠. 군에서 비행한 경력 덕분에 1년 만에 기장이 됐습니다. 그런데 잘 나갈 때 얘기는 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이 중요하죠.”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던 그는 항상 자신감이 넘쳤다고 한다. 그러나 정년퇴임 후부터 그는 인생의 쓴 맛을 맛봐야 했다.

김씨는 퇴직 후 사업을 시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IMF위기가 닥치면서 부동산 등 담보로 빚을 얻어 갖고 있는 재산도 날렸다. 세상을 살면서 처음 겪게 된 고통 때문에 심신은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대학교 총장인 친구를 찾아가 정수기를 팔러간 일도 있었어요. 체면 때문이었는지 한대도 못 팔고 그냥 발길을 돌렸죠. 식구들한테 정수기, 공기청정기를 떠안기기도 하고…”

그는 거짓말조차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김씨는 서 있었다. 사업에 투자했다 크게 실패한 그의 고생은 환갑 때부터 시작됐다.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어요. 비행을 하는 위험한 직업이었지만 사고 없이 퇴직할 수 있었으니 운이 좋은 것 맞죠? 재산도 재산이지만 몸까지 아프면서 생각을 바꿨어요. 한 줄이라도 내 삶을 기록해야겠다고.”

# 한중서에전 ‘특상’

군대 시절부터 메모를 시작했던 김씨는 사업 실패 후 수첩을 꼼꼼히 채워나갔다.

“퇴직 후 인생의 고난을 배우게 됐다. 메모를 하면서 힘든 마음을 다스리게 된 것이죠. 그렇게 안 했으면 쓰러졌을 거예요. 허허”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웃을 수 있는 김씨에게 지난 10여년의 세월은 자신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됐다.

“67년도 대위 시절만 해도 메모가 엉성했죠. 지금처럼 수첩에 일일이 기록하니까 언제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어 좋아요. 친구들끼리 싸움이 나면 저한테 물어봅니다. 우리 그날 뭐했냐고? 수첩보고 바로 대답해주면 싸움도 끝나죠.”

김씨의 하루는 빽빽하다. 용인노인복지회관에서 서예를 배우고 영통복지회관에서 풍수, 아코디언, 컴퓨터 등 다양한 교육을 받는다.

올해 7월 한중서예교류전에서 특선을 받았고 대한노인회 용인시 처인구지회가 지난 9월18일 주최한 65세 이상 휘호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처가가 용인에 있어 3년 전 용인으로 이사를 온 김씨는 용인에서의 삶이 무척 즐겁다.

“국전에서 수상한 작품을 수첩에 넣고 다닐 정도로 서예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번에 상을 타서 더욱 기쁘죠. 글을 가깝게 하니까 마음이 편안해 지고 군출신 선후배, 동기가 가까이 있어 좋더라고요.”

좋은 글귀가 있으면 수시로 수첩에 메모를 한다. 그리고 그 메모처럼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과거에 매달리면 늙어요. 우리 나이는 현실에 적응을 잘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저는 매주 스케줄이 있어서 재미있어요. 멍하게 있는 시간이 없고 혼자 있어도 할 일이 있어요. 수첩에 메모를 하면서 인생이 즐거워졌어요.”

김씨는 이렇게 적어둔 메모를 책으로 엮고 내년에는 아코디언을 들고 무대에 설 계획이다.

“80까지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요. 매일매일 수첩에 빈 공간이 없다는 것은 내 삶이 재미있다는 것 아닐까요.”

그의 일상이 적힌 메모 수첩에는 삶의 흔적이 빈틈없이 담겨 있다.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겠지만 지금 그의 인생의 맛과 향을 변화시킨 요소는 ‘기록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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