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계대탐사 8차

# 뻗은 고개 버들치 넘어 상현동으로

8차 시계대탐사에 나선 7일은 따가운 햇볕이 덜했다. 대신 후텁지근한 날씨는 일행의 발걸음에 만만치 않은 복병이었다. 광교산 줄기인 상현동 버들치고개에서 다시 탐사는 이어졌다. 완만한 능선은 그간 산행으로 다져진 단원들에겐 숲길을 산책하는 것처럼 편안하고 상큼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 버들치고개라고 하니까,

대개는 버드나무를 연상하던가, 아니면 물고기를 떠올리곤 하죠. 그러나 ‘버들’은 이와는 무관한 ‘뻗은’으로 봐야 합니다. 즉 버들치는 ‘뻗은 고개’라는 뜻이죠. ‘치(峙)’의 뜻은 대개 알고 있죠? 고개의 높이와 크기에 따라 대략 현(峴), 치(峙), 령(嶺)으로 구분하는데, ‘치’는 그 중간정도에 해당하니까, 가볍게 볼 수 없는 고개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김장환 생태환경팀장의 설명에 약수터 이곳저곳에 편안자세로 휴식을 취하며 듣던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 김장환씨가 설명을 하고 있다.

▲ 양춘모 식생팀장이 참나무와 신갈나무, 떡갈나무 잎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춘모 식색팀장이 이어 나선다. “새중의 새는 무슨 새죠? 참새입니다. 그럼 나무 중의 나무는? 그럼 참나무? 맞습니다…”식생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는 양팀장으로부터 구수한 옛 이야기를 섞은 참나무과 나무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어느덧 더위에 흘러내린 땀은 말라버렸다.

상현동쪽에서 오른 주민들의 격려와 응원의 소리를 들으며 탐사단원들은 다시 장정을 시작한다. 수원과 수지구가 맞닿아있는 광교산 자락에는 독바위 쪽으로 특공연대가 주둔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등산로는 철조망을 따라 걸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군부대도 이전을 준비 중이다. 잘 알져진 대로 광교신도시가 곧 이곳을 수용해 건설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1124만㎡(341만평)에 조성되는 신도시에는 용인시 땅 133만㎡(40만평)이 포함돼 있다. 수지구 상현동 가운데 독바위를 비롯해 수원 경계지역과 가산, 두바위, 응암 마을 등이 해당된다.

▲ 광교지구에 포함된 상현동에 설치된 택지지구 안내판으로 이 일대의 미래를 예감케 한다.
# 광교 신도시, 역사적으론 용인 땅

사실 역사적으로 따져본다면 경기도지사가 최고의 명품신도시로 조성한다며 최근 발표한‘광교 신도시’는 ‘용인신도시’에 다름아니다. 왜일까. 총 1124만㎡에 달하는 면적은 과거 거의 용인 땅이었다. 먼저 수원 이의동을 보자.

현재 수원시 영통구에 속해 있는 이의동은 수원 전체면적 121.4㎢의 1/10에 해당한다. 엄청난 면적이다. 한마디로 수원시에서 가장 넓은 동이 되었다. 대대로 용인에 속해있던 이의동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4년 4월. 조선 전 행정구역을 폐합하면서, 지내면에 속해있던 이의동 지역을 기존 수진면과 합쳐 수지면(水枝面)으로 통합됐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상(儀上)과 의하(儀下)를 합쳐 이의리(二儀里)라 하였고, 마찬가지로 하리와 덕곡동 일부를 합쳐 ‘하리’라 하여 용인군 수지면 관할로 개편되었다. 전형적인 용인의 농촌지역으로 원천저수지와 신대저수지를 끼고 논농사가 우세했던 곳이다. 특히 현재 원천저수지는 본래 청주한씨 집성촌이 있던 지역으로 일제 때 저수지를 막으면서 하동으로 이사해 마을이 형성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현 수원의 1/10 면적에 해당하는 이의동이 언제 수원에 편입되었을까. 때는 1983년 2.12일이다. 당시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와 하리가 수원시에 편입돼 이의동이 된 것이다.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해 용인시 관할에서 수원시 관할로 편입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도시계획 수립 권한의 문제였다.

즉 당시 군(郡) 단위였던 용인은 상위법에 의해 자체적인 도시계획을 세울 수 없었다. 반면 이미 경기도청이 옮겨와 광역시를 추진하던 수원시가 용인 땅의 상당 부분을 자체 필요에 의해 수원시 도시계획에 포함시켜버렸고, 힘과 법적 권한이 없던 당시 용인군은 그냥 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 용인시가 영통을 비롯한 많은 지역을 수원에 내 준 것도 비슷한 과정으로 보면 된다. 이 같은 불합리한 사슬이 끊긴 것은 1996년 3월, 용인이 ‘시’로 비로소 승격되면서 부터다.

다만 부연해 둘 것은 용인 땅이던 영통이 수원에 넘어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주민을 대표하던 당시 군의회의 지역주권의식 부재가 한 몫을 거들었다. 당시 일부 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의회 수뇌부는 수원시에 용인시 영통을 넘기는 데 도장을 찍고 말았으니,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그 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훗날로 미루도록 한다.

# 상현동과 정암 조광조의 만남

장마철 먹구름이 잠깐 물러난 틈을 타 뙤약볕이 내려쬔다. 상현동 43번 국도에 닿은 대원들 가운데 일부는 벌써부터 축 처지는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은 심곡서원과 정암 조광조 선생 묘역에 잠시 들르도록 짜여진 프로그램이었다. 상현동과 조광조, 그리고 심곡서원의 만남. 마침 눈에 들어오는‘심곡마을’이란 아파트 이름과 ‘원촌’이란 지명이 그 인연을 풀어가는 단초를 만들어 준다.

▲ 심곡서원

▲ 심곡서원에서 기념촬영.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어간 조선조의 대표적 개혁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 정암 조광조. 기록에 의하면 그의 증조부 조육은 용인 이씨 이백찬의 사위가 돼 신갈에 묘를 써 용인과 인연을 맺는다. 그 아들이자 정암의 조부인 조충손이 이곳 심곡리(현 상현동)에 유택을 마련하면서 정암의 아버지인 조원강 역시 선대 묘를 따라오게 되니, 심곡은 한양 조씨의 세장지가 됐다.

당연히 조광조는 용인에서 많은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의 나이 19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묘막을 짓고 시묘하면서 서원말에 머물던 정암은 시묘가 끝난 후에도 선영 묘를 떠나지 않았다. 그 밑에 초당을 몇 칸 짓고 영원히 조상을 사모하는 곳으로 하였으며, 못을 파고 축대를 쌓아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10여년의 세월이었다.

당시 지명을 따 지은 심곡서원 역시, 조선 후기 서원철폐령에 의해 수백 개의 서원이 없어졌음에도 건제했던 47개 서원의 하나가 됐던 것 역시 사액서원이라는 특별한 지위와 더불어 정암에 대한 후대의 높은 평가가 한 몫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용인시계탐사단 50여명의 단원들은 정암선생의 혼이 서린 심곡서원과 그의 손길이 느껴지는 느티나무와 연못을 들러본 후 그의 묘역을 찾았다. 언제부턴지 철조망 울타리가 둘러 싸 일부는 밖에서 머리 숙여 참배 한 후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 광교택지개발로 철거를 앞두고 있는 가옥. 사람이 살고 있다는 문구가 씁쓸하기만 하다.
# 사람 흔적 사라진 을씨년스런 빈집 그리고 개발 현장

43번 국도를 따라 독고개를 향하던 발걸음은 수원과 경계에 이르러 좌로 방향을 틀었다. 드믄 드믄 민가들이 있지만, 대개는 빈 집이다. 이미 주변 산도 광교신도시 발표에 맞춰 공사가 시작된 듯 벌건 황토를 드러낸 곳도 눈에 띈다. 함승태 기록팀장이 을씨년스런 빈집 이곳저곳을 다니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 버려진 폐타이어가 탐사단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출입하지 마시오. 사람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카메라에 담긴 한 컷의 사진과 글 한 대목은 이 마을의 현재 모습과 상황을 그대로 설명해준다. 다큐 사진의 위력과 감동이 느껴진다. 새로 산행팀장을 맡은 황영용 산사랑산악회장은 연신 땀을 흘리며 시계 길을 정확히 탐사하느라 산등을 넘고 영동고속도로 밑을 넘나든다.

단원들은 군소리 없이 그의 발길을 좆기에 바쁘다. 그러나 최근 이곳은 고속도로를 경계로 수원과 용인 경계를 나뉘었으니, 우리는 옛길을 탐사하는 격이 되었다. 한창 흥덕지구 공사관계로 옛길걷기는 위험하기만 했다. 부득이 단원들은 차에 올랐다. 신대저수지를 지나 양편으로 펼쳐진 것은 파헤쳐진 흙더미 뿐이었다.

400백년 된 덕수이씨 집성촌 영덕리 덕골과 오평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곳엔 수여선으로 불렸던 경동철도 철로도 없었다. 다만 남아있는 것은 등신, 귀신, 망신소릴 들어 ‘삼신열차’라 불렸다는 협궤열차에 얽힌 추억 뿐이었다. 용인의 경계에선 이처럼 우리의 옛 흔적과 역사와 사람이 사라지고 있었다.

/글 우상표 용인시계대탐사단 공동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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