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옛땅이름 (87)

시루는 쌀이나 떡을 찔 때, 콩나물 등을 기를 때 사용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그릇을 이르는 말이다. 주로 질그릇이나 오지그릇으로 만들며 이제는 시골에서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시루의 모양은 자배기 비슷한데 바닥보다 위의 지름이 약간 크고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고 양편에 손잡이가 달려있다.

시루 안에는 시루밑이라고 하여 칡덩굴이나 길섶에 있는 풀을 엮어서 만든 깔개를 깔았는데 이는 쌀이나 가루 등이 빠지지 않게 하는 도구이다. 한국에서 시루를 쓰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라고 하는데 당시의 시루도 오늘날에 사용하는 것과 구조나 모양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한다.

이 시루의 명칭이 땅이름에 그대로 옮겨가서 ‘시루봉’이나 ‘시루산’이라고 하는 지명을 낳았는데 실제로 전국 각처에 시루봉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가 많이 있다. 용인지역에는 광교산에 시루봉이 있고 처인구 포곡면 유운리에도 시루봉이 있으며 모현면 매산리 상마산에도 ‘시루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등산객들에게 이름나 있는 월악산이나 진해 웅산, 주왕산, 그리고 고구려 유적으로 유명한 구리시의 아차산에도 시루봉이 있는데 전국의 크고 작을 시루봉을 든다면 이루 셀 수 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루봉의 유래를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이 같은 대답을 하고 있는데 가장 많은 것이 산모양이 시루를 닮았다고 하는 것이다. 또 시루떡처럼 층층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시루봉으로 부른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한자로 옮길 때는 대부분 증봉(甑峰)이나 증봉산(甑峰山), 또는 증산(甑山) 등으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증(甑)이 시루를 뜻하는 글자이기 때문인데 뜻을 따라 옮긴(訓借) 결과이다.

그러나 시루봉이나 시루산으로 불리는 모든 산들이 시루를 닮아서 이러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수많은 시루봉가운데 그 형태가 시루를 닮아 시루봉이 된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수리봉’이 변한 이름이라고 한다. ‘수리’는 높다는 뜻을 가지는 옛말이라고 하는데 이 ‘수리’의 원형이 ‘ ’로 수많은 갈래로 변화되어 많은 땅이름을 낳았는데 시루봉도 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실제로 명칭도 지방에 따라 스리봉, 시리봉, 시래봉, 서리봉 등으로 조금씩 달라지는데 시루의 방언이 시리, 실리, 슬구 등으로 달라지는 것을 보면 지방마다 달리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 조상들이 종종 산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을 시루산으로 불렀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인 백두산을 시루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시루봉이라고 불리는 산들이 독자적인 하나의 산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시루봉이 큰 산 가운데 특정한 봉우리를 가리키는 이름이고 보면 이러한 설명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또 산이나 봉우리를 가리키는 이름 이외에도 시루골이나 시루고개 시루재 등의 지명도 전국적으로 흔치 않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가 역시 높다는 뜻을 가진 ‘수리’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용인지역의 시루봉이나 시루산들이 과거 집집마다 떡을 찌거나 콩나물을 길렀던 시루에서 비롯된 이름이아니라 높은 산의 뜻을 가지는 지명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생활에서 시루가 멀어졌듯이 시루봉도 ‘수리’로 불리던 본래의 뜻은 멀어지고 전혀 관계가 없는 ‘시루’로 설명이 변하게 된 이름이라고 하겠다.

/ 정양화 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향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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