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옛땅이름(85)

▲ 정양화(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향토문화연구소장)
향수산은 처인구 포곡면 가실리 에버랜드 뒤쪽에 있는 (白蓮寺)의 뒷산이다. 백련사는 본래 백련암으로 서기 802년(신라 애장왕 2) 신응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용인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흔히 절 이름을 표시할 때 「 산 사」와 같이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절이 위치하고 있는 산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산 해인사나 덕숭산 수덕사처럼 백련사도 앞에 향수산을 붙는데 기록을 찾아보면 향수산(香水山)과 향수산(香秀山)의 두 가지 표기가 있다.

향수(香水)나 향수(香秀) 모두 향(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이다. 향은 부정(不淨)을 제거하고 정신을 맑게 함으로써 신명(神明)과 통한다 하여 중국이나 한국에서 제사와 같은 의식에 많이 사용해 왔고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불교에서도 모든 의식에 반드시 향을 피우며 동양은 물론 서양의 종교의식에도 향이 사용되고 있으며, 각 종교나 종파에 따라 분향과 관련된 도구나 의식이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다.

향수산(香秀山)은 백련암 약사(略史)에 나타나고 있는 표기로 1871년에 간행된 『용인현읍지』와 1899년의 『용인현읍지』에도 같은 기록이 보인다. 향수산(香水山)은 1862년의 『대동지지』와 여러 읍지에 첨부된 지도(地圖), 그리고 대동여지도에도 동일하게 표기되어 있다.

특히 1899년의 『용인현읍지』를 보면 지도에는 향수산(香水山)으로, 내용가운데는 향수산(香水山)으로 되어 있어 특별한 구분이 없이 함께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향수(香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531년에 간행된『동국여지승람』이다. 용인현 동쪽 이 십리에 향수사(香水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17세기 중엽에 가행된 『동국여지지』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이 되면 향수사는 사라지고 백련암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절이 있는 장소가 시대에 따라 선장산과 향수산의 두 군데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데, 하나는 선장산과 향수산을 혼동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의 위치가 이동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백련암의 위치를 표시하는 거리는 시오리(十五里)로 모든 기록들이 거의 같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백련암이 선장산에 있다고도 하고 향수산에 있다고 했으니 두 산을 혼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 절이 이동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실제로 1791년에 백련암을 중수하면서 적은 백련암 약사(略史)를 보면 불속에 소실되어(火中消失)라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보면 백련암이 과거의 어느 시기에 불로인해 다시 중건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유운리나 신원리 일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백련암이 본래 향수산의 북동쪽이 되는 신원리쪽에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구 절터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곳에 있던 절이 빈대로 인해 망했다고 전하며 향수산 북쪽 모현면 능원리 우명동쪽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갔다고 한다. 이를 참고한다면 반드시 현재자리에서 천년이상을 유지해 왔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각종 기록들을 참고하고 주민들의 증언을 참고해 볼 때 향수산은 향수사(香水寺)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후 새로이 절 이름이 백련암으로 바뀌면서 산 이름으로 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향수(香水)는 부처님을 목욕시킬 때 사 용하는 물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니 더욱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산의 이름이 지형이나 산의 형태 등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닌 것을 감안 할 때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확연해 진다고 하겠다.

/ 정양화, 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향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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