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림 묘소는 고기동 저수지 동쪽 산기슭에 있다. 황림(黃琳·1517~1597)의 호는 겸제(謙濟), 본관은 창원(昌原)으로, 조선 명종 17년(1562)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으로 관직에 올랐다. 선조 11년(1578) 종계변무(宗系辨誣 : 조선이 명나라 사적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줄 것을 명나라 조정에 요청한 일)를 위해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수기광국공신(修紀光國功臣)에 책록되었다. 황림은 3등 공신으로 의창군에 봉해졌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선조 30년(1597) 10월 24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황림의 분묘는 정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와 합장돼 있다.

분묘 정 중앙 앞쪽에 묘비를 세웠는데, 묘표에는 중앙 왼쪽부터 ‘수충익모 광국공신 정헌대부 이조판서 참지 경연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의창군 황공지묘(輸忠翼謨 光國功臣 正憲大夫 吏曹判書 參知 經筵 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義昌君 黃公之墓)’라 새기고, 오른쪽에 ‘정부인 파평윤씨지묘(正夫人 坡平尹氏之墓)’라 새겨, 시신이 있는 쪽으로 글씨를 배열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묘표 하단에 기단석을 두었고, 기단 아래에 혼유석과 상석을 배열했다.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고, 망주석과 직선을 이루는 바깥쪽에 문인석을 배열했다.

문인석은 이목구비가 잘 정제돼 그 표정이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줄 만큼 섬세하다. 흘을 받쳐든 양손에는 손톱 모양까지 세밀하게 표현돼 16세기 석조미술의 원숙미를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자료 용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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