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슬아슬 광대의 외줄타기는 아름답다

“세상 살아 가려면 줄을 잘 서야 되고 줄을 잘 타야겠죠. (하늘을 보며) 어쨌든 오늘 참 애매하구먼.”

개인 듯 하면 다시 먹구름이 하늘에 짙게 깔리고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 김대균씨 (41·기흥구 지곡동)가 지난 18일 막사발 축제 현장에서 신명나게 소리를 하며 관객들의 흥을 돋우었지만 궂은 날씨 탓에 결국 김씨는 ‘줄놀음’을 하지 못했다.  

# 7살 때부터 줄 위에서 놀아

김상봉-최상천-김관보-김영철·이동안-김대균으로 이어지는 조선줄타기의 전통을 이어받은 ‘광대 김대균.’
김대균씨는 줄타기 마당에서 걸음마를 배우며 자랐다. 아버지가 고향 정읍을 떠나 한국민속촌에 생활터전을 마련한 것이 계기였다.

아버지가 꽹과리를 치며 엿을 파는 동안 김씨는 민속촌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녔다. 농악  소리가 신났고 소리하는 모습이 정겹게 들렸다. 일곱 살 되던 해 또래 아이들 서넛과 함께 줄타기의 달인 김영철에게 사사했는데 결국 그 혼자 광대의 감성과 잔재비(기예)를 이어갔다. 

처음 줄에 오르고 3년 동안 밑줄(땅줄)만 탔던 그는 땅바닥 위에 줄을 놓고 중심 이동과 호흡법을 익혔다.
아들을 인간문화재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뒷바라지가 한 몫을 했다. 아버지는 79년 중풍으로 쓰러져 더 이상 줄에 오르지 못하게 된 스승을 아예 집으로 모셔와 수발을 들었고 그 이후 본격적인 전수가 이루어졌다.

한 손에 부채를 펴들고 줄을 타는 동작부터 뒷걸음질, 종종걸음, 돌아서기까지의 기본기를 수천 번씩 반복했다. 기초를 다진 이후엔 외홍잽이, 쌍홍잽이, 풍치기, 가새트림 등 줄의 탄력을 이용한 잔재비를 하나씩 익혀갔다. 그런 그는 중학교 3학년, 1982년 5월 5일 민속촌에서 첫 줄을 탔다.

“선생님의 병환으로 한동안 중단됐던 줄타기를 제가 다시 한다니까 난리가 났었어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모였거든요. 아버지도 흐뭇해 떡도 하고 막걸리도 받아 동네잔치를 벌였죠.”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그에게 태산같았던 스승이 세상을 떠나면서 20대 초반 김씨는 방황했고 공허한 마음에 술과 담배를 배웠다. 하지만 그에게 힘을 준 동네 친구들 덕에 서울로 판소리를 배우러 다니며 다시 줄에 올랐다.

줄타기 광대로 사람들 앞에 선 이후 민속촌 상설공연을 해오던 김씨는 민속촌 밖 세상이 궁금했다. 그래서 놀이터 삼아 뛰어놀던 민속촌을 떠나 1994년 안성에 자리를 잡았다. 안성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무렵 그는 아내를 만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벌써 중학생이 됐다. 그리고 지난해 고향인 기흥구 지곡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지금까지 벌인 줄판만 1만회가 넘었어요. 국내외 초청공연만 매년 60회 정도 하는데 전국을 다 돌았지만 줄타기 공연을 똑같이 해본 적이 없어요. 줄타기 공연은 즉흥성이 강해 매번 판이 달라지거든요. 재담도 급수가 있는데 학습과 훈련은 기본이고 광대 자신이 그때그때 상황을 인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의 재담과 사설이 전해질 때마다 객석은 들썩거린다. 지역에 따라 관객과의 교감도 다르다.

 “언젠가 공연을 하러 갔는데 단체장이 무시를 했어요. 그래서 줄 위에서 재담을 떨어줬더니 대우가 달라졌죠.”

김씨는 줄과 광대와 관객이 끊임없이 대화하고 같이 호흡하는 것은 줄타기의 생명이라 여겼다.

그는 기흥구청에서 열린 효 잔치 한마당에서도 구수한 재담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민속촌을 떠나 14년 만에 처음 선 고향무대였기 때문에 감회도 남달랐다. “큰 축제를 많이 다니지만 용인에서 불러주면 더 좋죠. 많이 불러주십시오.”

# ‘왕의 남자’ 시나리오 작업 참여

줄타기는 영화 ‘왕의 남자’가 흥행하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김씨 또한 이 영화의 숨은 공로자다.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면서 줄타기를 보존하고 대중들에게 문화 자산으로 인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무관심이 가장 무서운 것 아시죠? 국가에서 인정했다면 최소한 소중한 사람이 아닌가. 안타까운 일이 많지만 관심을 많이 가져주길 바랄 뿐이다.”

김씨는 늘 줄 위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그 위에서 사람을 갖고 놀기도 한다. “돈 없고 힘  없는 사람이 바보처럼 보이지만 줄 위에선 그들이 바보로 보입니다. 이 시대 광대는 반드시 필요하고 줄을 통해 세상을 보죠. 그것이 광대의 몫 아닐까요.”

‘최연소 인간문화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부담감에 한때는 의무감으로 줄을 탔지만 그는 줄타기를 보존하고 계승하면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꿔 나갈 생각이다.

“제가 아이들을 참 좋아합니다. 어린시절 민속촌을 놀이터 삼아 놀았던 저 처럼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싶어요. 전수관이 있다면 줄타기를 가까이서 접할 수 있겠죠.”

김씨는 민속예술에 생명력을 불어넣겠다는 강한 의지를 전수관에 담고 싶어 했다. “예술가의 혼도 있고 삶의 방식도 숨겨져 있어야 진정한 문화자산 아닌가요.”

그는 요즈음 안동대, 서울예대 등에 특강을 나가면서 후배들에게 민속예술을 가르치고 제자 2명을 양성하고 있다. 웃음만 파는 광대가 아니라 진정한 광대가 되기 위해서.

김씨는 줄 위에서 마당을 가득 메운 관객들과 함께 사설을 엮어가며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에 말한다.

“백정과 재인이 뭐가 다른지 아십니까? 백정은 썩은 기둥에서 나온 노래기이고 재인은 똥에서 나온 파리입니다. 그러나 노래기는 사람 눈에 띠면 밟혀 죽지만 파리는 임금님 용안에도 앉을 수 있습니다.
신분상으로 똥파리지만 광대는 세상을 희롱하고 선비를 갖고 놀 수 있죠. 하하.”

(문의 줄타기 보존회 02-2666-7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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