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바람 타고 끊임없이 변신하는 천주교 순교지
수지구(읍) 어디를 가든 안온하고 차분한 느낌을 갖는 마을은 찾기 힘들게 됐다.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개발 붐에 외양과 더불어 주민들의 마음까지 어수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유한 자기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되는 곳이 용인 서북부 지역이다.
손골(蓀谷) 역시 다르지 않다. 자연마을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20여 년 전만 해도 30여 호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약 10년 사이에 210가구가 될 정도로 급속히 늘었다. 대부분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옛 어른들에 따르면 과거 손씨(孫氏)가 처음 입향해 손골이란 지명이 됐다고 전하나, 수지향토사를 연구하는 이석순 수지농협 전무는 다른 풀이를 하고 있다. 예부터 이곳에 향기로운 풀이 많고 난초가 무성한 곳이라 손골(蓀谷)이라 했다는 것이다.
“소나무가 많아 송골이라 했다고도 하나 본 유래는 고기리 손이터, 언덕말, 손위골 사이에 있는 산에서 나왔어요. 이 산이름이 손허산이지요. 손허산 골짜기 이름이 손허곡이요, 나중에 허자가 탈락해 손골이라 하고 고을 이름이 됐다는 게 정설입니다”
손골은 동천동(리)에서 가장 윗마을이다. 동막과 머네골을 빼고는 전부가 손골이라 할 수 있다.
손골은 윗손골, 가운데 손골로 구성돼 있다. 이곳은 시루봉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치마바위를 거쳐 아래손골까지 뻗은 한 골짜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골이란 가운데 손골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아래손골은 손골 밑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본래 손골은 피난골이라 불릴 정도로 외진 곳이다. 수지는 물론이고 수원에서조차 깊은 애착을 보이는 광교산 제2봉인 시루봉(582m) 자락을 타고 깊은 골이 형성돼 있다. 그런 탓에 마을 폭이 좁아 경작지는 미작 중심이 아니라 밭이 많다.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였던 임진산이 풍덕천동에 있다. 또 전쟁의 흔적이 광교산을 중심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건만 이 마을만은 빗겨갔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마을 깊숙이 있는 피난골이란 지명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손골마을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지역사회, 특히 수지 일대 생활과 문화 변천사의 한 단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농경지가 발달하지 않은 마을 입지 조건상 먼 옛날에는 생계수단을 화전에 의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주민들에 따르면 풍부한 산림을 이용해 땔감 채취가 주요 생계수단이었고 수원장이나 멀리는 과천 등지로 가져가 팔기도 했다.
조금씩 경작하던 벼농사는 90년대 초부터 서서히 줄기 시작해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아마 용인 일대 마을 단위에서 택지개발 등 인위적인 환경변화에 따른 강제적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주민들이 벼농사를 접은 것은 이 마을이 처음일 것으로 보인다.
마을을 둘러싼 외부 환경이 이 마을을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염광의원이 있는 밑동네 일부에 나환자촌이 형성되면서 그들의 생계수단이었던 가구 제작이 활성화돼 단지로 변했다. 그 영향으로 깊숙한 동네까지 가구 제작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약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가구산업의 약화와 잦은 화재 등으로 하나둘씩 빠져 나가는 추세다. 그 바람에 현재 동네 모습은 늦가을 특유의 을씨년스러움에 더해 삭막할 지경이다.
이처럼 생활수단의 변화과정에서 주민들의 구성도 바뀌었다. 210여 호 중 누대에 걸쳐 마을을 지키는 이들은 15호 정도에 불과하다. 약 10여 년 동안 살면서 어느 정도 동네 사람 축에 낀 이들이 비교적 넓게 차지하고 있다. 마을 일은 원주민들이 중심이 된 대동회, 청년회, 부녀회 등을 통해 이끌어 가지만 주민 구성 비율은 이제 압도적으로 전원주택을 지어 들어온 주민들이 다수다.
요즘 들어 특이한 현상 중 하나가 땅 값이 크게 들먹인다는 사실이다.
“농지나 대지 할 것 없이 평당 20~30만원 정도였는데 요즘 들어 100만원까지 치솟는 실정이에요. 신봉리와 성복리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땅을 판 사람들 중 멀리 떠날 의사가 없는 이들이 동네로 들어오고 있어요. 최근에만 약 10여 호가 이렇게 들어 왔습니다.” 깊은 골짜기답게 산수는 인근에선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려한 곳이 이 마을이다. 탄천의 최상류를 이루는 하천은 큼직한 돌들이 많고 오랜 세월동안 자연이 만들어낸 멋진 모양을 서로들 뽐내고 있다.
온갖 사연을 안은 바위와 골도 많다. 모양을 본 딴 숫돌바위, 치마바위, 성주바위 등이 그것인데, ‘성주바위’하면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햇곡식이 나면 자루에 1말 정도를 담아 접고 고깔을 씌워 갈무리 한 후 1년을 둔다. 씨앗 겸 비상식량 구실도 했다는 이것을 성주라고 하는데 그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범바위골도 있는데 응달지고 굴도 있어 예전에는 호랑이가 살았다 한다.
박평 문씨, 원주 원씨, 용인 이씨가 대대로 큰 성씨를 이루며 살고 있는 손골은 천주교 성지로도 유명하다. 약 16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신앙촌으로 성 도리 헨리꼬 김(베드로) 신부의 전교(傳敎) 유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기해박해(1838.헌종 4년 ; 헌종은 이해 11월 천주교를 금한다는 척사윤음을 반포해 백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금하는 교사를 내린다)를 피해 서울과 인근 지방에서 숨어든 신자들이 이룩한 신앙촌이었다는 것이다. 병인박해(1866 ;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 동안 8천여 명의 신자들이 학살됐다.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병인사옥’이라고도 불린다.)당시에는 10여 호로 이뤄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골은 주민들 사이에서 신자들의 마을, ‘성교촌’이라 불리어 오는데 특히 이요한, 그의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시스꼬 삼대가 손골에서 살던 중 병인박해 때 피신해 신미년(1871)에 순교했다 한다.
프랑스 페롱 신부 등이 입국해 조선말을 배우면서 활동한 곳이고, 조선 4대 교구장인 성 장(베르뇌)시므온 주교도 방문했던 곳이다. 특히 선교사인 성 도리 헨리꼬 김(베드로) 신부가 1865년 5월 조선에 도착한 후 말을 배우면서 전교하다가 병인박해가 기승을 부리자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키고 방안에 앉아 기도하던 중 밀고로 포졸에게 체포된 곳이라 한다.
그는 다른 외국인 신부들과 함께 효수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돼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대열에 들었다. 유해는 절두산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으나 그 중 일부를 분배받아 손골성지에 안치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천주교회사에 용인과 관련된 문헌에도 나타나 있다. “신유년 박해(1801) 또는 을해년 박해(1815), 정해년 박해(1827) 등을 피해 서울과 충청도, 멀리는 경상도 등지에서 온 천주교인들이 한 마을을 형성해 살던 곳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은이, 골배마실(양지면 남곡리), 한터(양지면 대대리), 사리틔(이동면 서리), 먹뱅이 한덕골(이동면 묵리), 손골(수지읍 동천리) 등에는 지금도 옛 군란에 얽힌 일화와 전설이 많다.”고 돼 있다.
이처럼 손골은 근래 들어 변화의 바람에 가장 쉽게 휩쓸려 내려가는 듯하지만 그 깊은 골짜기처럼 연연히 흐르는 마을 역사 속에는 종교적 순교지라는 사실도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지은이 우상표 / 용인자연마을기행1 / 330~33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