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교사서 교장까지 용동중 안종옥 교장

“용동중학교에 부임한지 올해로 34년이 됐어요. 한 학교에서 평교사로 출발해 교장이 되기까지 어려운 고비도 많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인근지역과 도시에서 이 농촌학교를 찾을 만큼 용동중학교를 명문학교로 만들어 왔다는데 긍지와 보람을 느낍니다.”

공부 좀 한다는 용인지역 학생들이 서울 수원 등 도시 학교를 찾아 떠나가던 80년대 초반, 시골 면 단위에 소재한 용동중은 전국에서 특목고로 처음 신설된 경기과학고에 합격생을 연달아 배출하며 충격을 주었다. 이후 매년 특목고 등 명문고 진학률이 꾸준히 상승하면서 오히려 인근 도시지역에서 이 농촌학교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몰리고 있는 역류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사학재단인 용동중학교(처인구 양지면)가 실력 있는 학교로 인정받기까지 안종옥(61) 교장은 이 학교를 묵묵히 지켜온 산증인이다.

중학교 입시제도가 존속했던 73년 그는 용동중에 첫 부임했다. 당시 용동중은 도시로 진출하지 못한 아이들이 주로 지망하는 마지막 학교였다. 52년도에 학교가 설립됐지만 이때까지도 겨우 학생 정원을 채워나가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가 영어교사로 부임한 이듬해 각 학교 학생들의 실력을 비교하는 경기도학력고사에서 용동중은 용인지역 9개 학교 가운데 평균 90점 이상으로 영어과목 1등을 차지, 그는 최우수교사상을 받았다. 연이어 다음해에는 용동중이 용인 전체 평균 1등을 석권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용동중은 보나마나 꼴찌였는데 다들 놀라더라구요. 나뿐만 아니라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그래서 실력 있는 학교가 됐는데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대요. 당시에는 내가 지나가면 ‘저기 똥통학교 선생 간다’ 고 놀리는 이들도 있었어요.”

명문학교를 만들어보자는 당시 김희진 교장의 포부는 그를 자극했다. 그는 학교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기본문법을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은 남겨서 알 때까지 가르쳤고 그러다보니 늦은 밤 귀가하는 일이 허다했다. 성실하고 일 욕심 많은 그는 차츰 주변의 신임을 얻어 33세 젊은 나이에 교감 직무대리로 승진했다. 유수한 학교의 학생들도 진학이 어렵다는 특목고에 잇따라 합격생을 배출하면서 용동중학교의 입지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99년 교장으로 취임한 그는 인재 발굴과 양성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조국 선진화의 길이 과학 기술의 발전에 달려있다는 평소의 지론대로 그는 특히 과학분야의 영재 육성에 정성을 쏟았다. 그 결과 3년 전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영재교육시범교육기관으로 지정됐고 지난해 정식 영재교육기관으로 승인, 각 학교의 벤치마킹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또 세계적인 인재육성을 위해 학교간 국제교류를 실시, 일본 아사히중학교와 관계를 맺은데 이어 지난해부터는 용인시와 교류하고 있는 중국 양주시의 신화중학교와 조인식을 갖고 교류하고 있다. 현재는 필리핀과의 교류를 추진 중에 있기도 하다. 용동중의 국제교류는 특히 홈스테이로 진행,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사장께서 국적 있는 교육과 외국어교육을 강조하시는데 저도 동감합니다.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는 주체성을 바탕으로 세계인으로서의 역량이 길러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재양성 국제교류 적극

용동중의 대내외적인 이미지는 ‘공부 잘하는 학교’지만 안 교장이 무엇보다도 중시 여기는 것은 인성교육. “아이들의 인성만큼은 책임지겠다”는 것이 그가 늘 마음에 다지고 있는 각오다. 지난해부터 실시해온 무감독시험도 이같은 인성교육의 일환. 작년 1학기말에 1학년만을 대상으로 했던 무감독시험을 올해는 전학년으로 확대 실시했다. 이는 학생들이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믿어준 대로 아이들은 따라주었다. 불미스런 사고 없이 치러낸 무감독시험을 통해 교사와 학생간 신뢰가 더욱 쌓이는 계기가 됐다.

“우리는 자긍심을 갖고 서로를 ‘용동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학교만큼 스승의 날 졸업생들이 많이 찾아오는 학교도 드물 거예요.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교사들도 마찬가지예요. 저희 학교의 특징은 절대 경력자를 채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교단에 처음 발을 디딘 교사들이 용동인으로 만들어지면서 진정한 교육자가 돼 가는 거지요.” 퇴근을 미루고 오후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무보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볼 때면 그는 안쓰럽고 미안하다. 묵묵히 그를 따라주는 교사들의 열의가 명문 용동중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

안 교장은 지역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용인시민장학회 이사직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용인시교총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그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지역사회가 인재육성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점. 특히 용인시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설립된 용인외국어고등학교에 지역 학생을 유치하는데 용인시민이 관여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용인지역 학생 선발을 외국어대학에 일방적으로 맡겨 놓는 것은 잘못이라고 봐요. 그러다보니 내신에 불합리한 기준이 적용되고 있어도 아무 말 못하는 게 현실이에요. 외국에 몇 년 살다 와서 영어만 좀 되는 아이는 합격하고 정작 성실하게 공부해 고른 실력을 갖춘 아이는 떨어지다 보니 입학생 지역할당제가 있어도 처인구 쪽 아이들에게는 아주 불리합니다.”

그는 할당제를 학교별로 적용, 용인지역 각 중학교의 우수한 학생들에게 외고 진학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이들이 학력이 아닌 학구별로 중학교를 배정받은 만큼 각 학교 우수생들의 학력도 비슷하다는 점에서 일부에서는 설득력 있는 제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음에 품고산 ‘스승의 길’

그는 옳다고 여기는 일은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타고난 ‘선생’이다. 교육과 관련된 사안이 아니면 앞 뒤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기에 세상물정에는 좀 뒤쳐진다는 소리도 듣는다. 그런 탓에 교장이 되어서야 겨우 시내에 번듯한 아파트를 장만했다. 그래도 한평생 교직에 몸담아 온 것을 후회해 본적은 없다. 부귀영화를 이루진 못했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필요한 인재를 키우는 일에 누가 뭐래도 소신껏 매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교사의 길을 꿈꿔 왔다. 대학 4학년 때부터 무보수로 고등공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신처럼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숱한 도시의 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어도 농촌의 작은 학교인 용동중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겐 이같은 초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사들에게 학생들을 편애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성적과는 상관없이 담임의 펜대 끝에서 우등상 수상자가 결정되던 어린 시절, 공부는 잘했지만 가난한 그에게 우등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교육은 그리고 교육자는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깨달았다.

안종옥 교장은 ‘스승의 길’이란 시를 마음에 품고 산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영원히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읊조리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다.

“스승의 자격은 정직과 사랑이다/ 사람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다/ 사람은 사랑의 크기에 따라 대접받는다/ 교육은 사랑으로 한다/ 지식과 방법론에 따라야 하지만 교육의 핵심은 사랑이다/ 우리의 스승은 잘난 사람이 필요치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남을 가르치는 사실만 가지고는 스승이 될 수 없고/ 교양과 실행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만/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사랑보다 더 숭고한 보람은 없다/ 정직보다 더 훌륭한 가치는 없다/ 정직하게 살면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우리들의 좌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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