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봉사로 다시 사는 인생 성악가 박재성씨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60대 노장이 부르는 노래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힘 있는 테너 음이 쩌렁쩌렁하다. 박재성씨(64)의 인생에 남은 것은 이제 노래뿐이다. 음악은 그의 동지이자 가족이고 마지막 안식이다.

현재 그가 소속돼 있는 합창단만 무려 5개. 수원난파합창단을 비롯해 용인지역에서만 용인문화원합창단, 용인여성회관 소속 아버지합창단, 용인혼성합창단, 반딧불이합창단 등 4개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주로 청장년이 현역인 합창단에서 그는 고령층에 속한다. 난파합창단에서는 서열 두 번째 연장자이고 용인지역 합창단에서는 단연 최고참이며 최고령이다.

젊은이들도 소화해내기 어려운 5개 단체의 공연스케줄과 연습으로 늘 일정이 빽빽하지만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하다. 단원들이 모이기전 미리 연습실을 치우고 준비하는 일까지 자청하면서 자신의 몸이 건강한 것에 오히려 감사한다.

# 60대에 5개 합창단서 활동

그의 이력은 다방면에서 화려하다. 젊은 시절 축구선수로 활약했고 용인군 체육회 이사, 용인궁도협회 창립 멤버, 수원시 빙상연맹 부회장을 역임하며 체육계 발전에 일조했다. 또 지역사회 유지로서 YMCA 후견기관인 국제와이즈멘 용인클럽 창립, 한국어린이복지재단 후원 등 각 사회단체와 복지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 그에 대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현재도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직을 맡고 있을 만큼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과 열의가 남다르다.

한때 500억대 재산을 소유하며 재력가로 불렸던 그, 그러나 현재 그는 기초생활수급자의 처지에 놓여있다. 재산도 가족도 모두 떠나버린 지금, 홀홀 단신 거처하고 있는 집마저 곧 헐릴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삼팔선 이북 강원도 철원 출생인 박재성씨는 김일성중학교 1학년 재학시절 한국전쟁을 만났다.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전쟁은 생활의 터전을 앗아갔다. 월남민 신세로 전락, 생계를 이어오던 그가 용인에 정착한 것은 77년. 결혼과 함께 그는 당시 김량장리 시외버스터미널 한 모퉁이에 구멍가게를 열었다.

박씨 부부는 허리띠를 졸라맸다. 비록 작은 가게였지만 10여년을 성실하게 일한 결과 사업장을 넓힐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곳곳에 적지 않은 부동산도 소유하게 됐다. 당시 박재성씨는 장애인청소년들이 일할 수 있는 세차장을 마련하는 한편 장애인 자활을 돕기 위한 전자제품 조립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 자신이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낸 데다 그의 아내는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어 소외된 이웃에 더욱 눈길이 갔다.

건장한 체격을 타고난 그는 어려서부터 약자의 보디가드 역할을 자초하곤 했다. 소년시절에도 전쟁고아들을 경계하던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리 고아원 아이들을 친구 삼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카투사로 근무하던 군에서는 주말이면 고아원인 도봉유린원과 펄벅재단을 찾았다. 동료들을 설득해 모은 후원금으로 아이들에게 먹이고 입히고 영사기를 들고 찾아가 영화를 보여주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언젠가는 고아원 양로원시설을 직접 세워야겠다고 그때 결심했어.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은 복지사업에 대한 꿈을 아직 못 이뤄서 그런 거 같아.”

고생 끝에 남을 돕고 살만큼 풍족한 재산을 모았지만 그러나 그는 인생의 또 한 고비를 만났다. 보증 선 것이 잘못돼 파산 지경에 이르렀고 얼마간의 재산이라도 지켜보고자 박씨 부부는 95년 협의이혼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법적인 이혼이었지 실제 결혼생활은 그대로 유지된 상태였다.

하지만 경제적인 타격은 가정불화로 이어졌고 그는 곧 아내와 1남1녀의 자녀에게서 떠나야했다. 거처할 곳은 물론 주민등록상 주소조차 없는 노숙자가 되어 그렇게 1년여를 보냈다.

한때 잘나가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처지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마저 보냈다. 지역사회에서 각종 단체장을 역임했던 그의 이력을 들어 ‘전국노숙자협의회 회장’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 지금도 복지사업 꿈 간직

주변의 따가운 눈총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겐 노래할 수 있는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 성악가 박재성씨는 용인에서만 4개의 합창단에 속해 있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수원난파합창단이 창단되던 70년대 초반 단원으로 입단했던 것이 계기가 돼 성악과 인연을 맺은 그는 결혼하면서 접었던 합창단활동을 20년 만에 재개하게 됐다. 먹고 사느라 잊었던 노래였다. 난파합창단 후배를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계기가 돼 그 길로 합창단에 다시 들어갔다. 이후 용인지역 내 합창단이 속속 창단되면서 그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악보는 볼 줄 몰라도 내가 음악 듣는 귀는 좀 있거든. 그래서 오디션 없이 난파합창단에 들어갔고 지금도 악보를 모르니까 옆에서 들리는 소리로 음을 잡아요. 그렇게 해도 정확하게 소리를 잡아내고 성량이 커서 목소리만 들으면 사람들이 내가 나이 많은 사람인지 전혀 몰라.”

경제적인 어려움, 가족을 잃은 외로움보다도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다.

그의 애창곡은 ‘고향생각’과 ‘보리밭’. 그밖에 그가 많이 부르는 노래는 ‘애국가’와 각종 국가기념일에 불리는 노래들이다.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크고 작은 단체에서 국가기념일 행사를 가질 때마다 그는 단골로 불려 다니며 애국가와 기념일 노래를 부른다. 일종의 노래를 통한 봉사활동인 셈이다.

“오랫동안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해온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을 갖게 돼 있어요. 내가 그래서 그런지 공식적인 행사에서 애국가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보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어. 예전에는 행사를 하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당연했는데 말이야.”

가족과 재산을 잃고도 노래가 나오느냐고 물었다. 더욱이 그는 현재 살고 있는 무허가 가건물마저 조만간 헐릴 것이라는 계고장까지 받은 상태다.

“나는 끄떡 안 해. 건강한 몸과 노래 부를 수 있는 게 나한텐 아직 남아있는 재산이야. 노래를 부르면서 스트레스도 날리고 남도 즐겁게 해주니 얼마나 좋아. 지금까지 봉사하며 살았는데 다 잃었어도 노래만은 남들에게 줄 수 있잖아.”

과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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