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보존회 이주명 단장

그가 있는 곳에는 흥이 있고 웃음이 있다. 객석에 폭소가 터져 나오면서 레크리에이션 강사 못지않은 말솜씨로 좌중을 리드하다가도 금방 신명나는 풍물가락을 들려준다.

용흥농악단과 우리문화보존회를 이끌고 있는 이주명(62·기흥구 신갈동) 단장. 지역행사에서 그는 빼놓을 수 없는 약방의 감초다. 특히 각 읍면동 축제가 몰려 있는 봄가을에는 하루를 공연으로 시작해 공연으로 끝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공연 횟수를 따지면 아마 1년에 60~80회 정도 될 거예요. 불러주는 곳은 어디든 가지. 우리 것이라 좋고 우리 혼이 담긴 소리라 좋고, 내가 좋아서 하다보니 저절로 봉사활동도 많아지게 되더라구.”

꼼꼼하게 기록해 놓은 일정표에는 쉬는 날이 거의 없다. 1주일에 정기적으로 한번씩 가는 풍물지도 모임만 다섯 곳. 어린아이들부터 주부, 노인에 이르기까지 지도대상에 연령층도 다양하다. 올 들어서는 토요일마다 장애인와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반딧불이문화학교의 풍물지도까지 맡았다. 물론 강사료도 개의치 않는다. 관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인 경우 강사료가 지불되지만 일반단체 지도인 경우 주면 받고 안 줘도 기꺼이 봉사에 나선다.

그가 주로 가르치는 것은 사물놀이와 농악. 그뿐만 아니라 그는 상여소리, 민요 등을 망라하여 전통가락을 연주하고 있다. 누구에게 사사를 받은 것도 아니고 어린시절부터 우리 소리가 좋아 한 두개씩 시작한 것이 이제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그를 전문 연주가로 만들어놓았다.

전통악기들 가운데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것은 태평소. 국악을 통한 그의 봉사활동은 태평소로부터 시작됐다. 이 악기 하나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그가 직업군인으로 20년을 봉직하다 육군 상사로 전역한 때는 1985년, 평소 농악에 심취해 있던 그는 무작정 태평소를 들고 한국민속촌으로 들어갔다. 태평소 소리에 매료돼 연주법을 배우고 싶었지만 선생을 만나기 힘들었다. 그는 민속촌 농악단에서 태평소를 배우며 이후 10년간 매주 정기공연을 가졌다.

“무보수로 갖는 공연이었지만 너무 하고 싶었던 일이라 10년을 했어요. 신나는 농악 장단이 펼쳐지다 태평소 소리가 거기에 어우러지면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 구슬프면서도 애잔한 소리가 농악의 빠른 장단과 묘한 조화를 이루지. 태평소는 본래 호적, 쇄납, 날라리라고 불렀는데, 그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해서 태평소라는 별칭이 붙었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 편안하면서도 구슬픈 가락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배우기 까다로운 악기를 굳이 택한 이유는 남들이 하지 않는 희소성 있는 악기라는 점도 작용했다.

“지금도 배우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어쩌다 배워보겠다는 사람이 있긴 한데 한달도 못 채우고 다 가버렸어. 그만큼 연주하기가 어려워요. 그렇지만 배우고 나면 이만한 악기가 없어. 태평소는 마음을 소리 내는 악기에요. 아리랑의 묘미를 가장 잘 살려주는 악기가 바로 태평소지.”


# 다시 태어나도 풍물로 봉사할 것”

1990년부터 활동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한 스크랩북은 백과사전만큼이나 두툼하다. 스크랩북의 표지에 그가 직접 써서 붙여 놓은 차트글씨가 눈에 띈다. ‘나는 봉사하는 사람이 될래요.’

그 다짐대로 그는 국악기를 들고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축제의 자리뿐만 아니라 경로당, 양로원, 정신병원 등 그늘지고 소외된 곳도 마다하지 않는다. 백암 세광정신요양원의 경우 정기적으로 발걸음한지 벌써 10년이 됐다.

6년전 국악 풍물 민요 전통무용단으로 구성된 우리문화보존회를 창립한 이후에는 정기공연과 함께 독거노인 위로잔치 등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 오고 있다.

“노인들이 있는 곳에 많이 가다보니 노후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고 강의도 해요. 노인들에게 절대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얘기하지. 손을 바쁘게 놀리는 것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비결이야.”이주명 단장은 어디를 가든지 악기 외에 항상 소지하는 것이 있다. 자필로 빼곡하게 메모된 그만의 유머집이 바로 그것.

“1년 중 울면 안 되는 날이 언젠지 알아요? 내가 이런 문제를 내면 대부분 크리스마스라고 그러지. 답은 중국집 문 닫는 날이야. 노인 분들에게 이런 퀴즈도 내고 노후를 아름답게 하는 1부터 10까지의 수칙도 얘기해 주지. 일은 일일이 간섭하지 말 것, 이는 이치를 따지지 말 것, 삼은 삼삼하게 살 것…”

그의 유머 강의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그 자신도 노년기에 접어들었지만 어느 공연장을 가나 마주치는 80~90대 노인들을 보며 아름다운 노후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웃음과 흥을 줄 수 있다는 것에 그는 보람을 느낀다.

이 단장의 유머는 노인들만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것과 최신 시사 유머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으로 다양하게 준비돼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즉시 메모하고 써먹는다는 그는 유머집의 내용만으로도 족히 10시간 분량을 강의할 수 있단다.

그는 매사에 연구하고 노력한다. 기쁜 날이든 슬픈 날이든 사람들이 그를 찾는 것은 어쩌면 작은 모임 흘러 다니는 이야기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그의 삶에 대한 열정을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는 “빠른 걸음 가난 없고 느린 걸음 부자 없다”는 옛 어른의 말씀을 간직하며 산다. 좌우명대로 부지런히 살아온 인생이기에 지금의 봉사하는 삶이 만족스럽다.

그러나 우리 민속 문화를 사랑하는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 지역의 행사에 참여하면서 그에게는 늘 아쉬운 것이 있다. 인근에 농악을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는 이렇다할 국악공연장이 없다는 점이다. 농악에 쓰이는 타악기나 태평소 모두 소리가 크다보니 연습장을 고르고 골라도 주변의 항의를 받기 일쑤라는 것. 고육지책으로 이 단장은 자신의 자택 지하실을 개조, 1천만원을 들여 방음시설을 갖추고 연습장으로 내놓았다. 원하는 사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자격도 제한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풍물을 하고 태평소를 불거예요. 지금처럼 틀림없이 이렇게 살 겁니다.”끝없는 질주를 재촉하는 인간사, 급하게 몰아치는 휘모리장단을 잠재우며 그가 부는 애절한 태평소의 한 가락이 마음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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