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술가 안일순씨 농사·문화 접목 씨알학당 만들어

그는 줄곧 여성을 그려왔다. 글과 그림으로 그려진 그의 주인공들은 암울하다. 전쟁과 군사주의와 남성에 짓이겨져 일그러진 형상들이다. 그는 50줄에 접어들 때까지 동두천 오키나와 푸에르토리코의 미군기지촌에 남겨진 흔적들을 끌어안고 세상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랬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치열한 페미니스트였다.

그의 나이 쉰 둘. 이제 그는 우울한 까만색을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꽃과 풀을 닮은 빨강과 파랑을 ‘자연스럽게’집어 들었다. 그의 작업대에는 군사문화로 표현됐던 번들거리는 PVC필름은 치워졌고 그 화학물질이 놓였던 자리에 크고 작은 조롱박들이 뒹굴고 있다. 그는 한가한 손놀림으로 조롱박에 형용한 오색 빛의 띠를 둘러놓았다.

안일순. 소설가이며 미술가인 그가 지난해 7월 원삼면 학일마을에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도 그도 변해갔다.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도시 여자’안일순은 이제 비로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며 유유자적 살고 있다. 그가 현재 하고 있는 대외활동은 오직 한 가지. 팜스테이 마을인 학일마을의 이벤트와 문화예술을 기획하는 일이다. 마을지도자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시작한 이 일은 그의 시야를 미군기지촌에서 농촌으로 돌려놓으며 페미니스트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그의 삶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고 있다.

생명력 넘치는 자연에 충족감

그는 그동안‘뺏벌’‘과천미인’‘사랑이 싫은 이유’등 소설과 희곡을 통해 왜곡되고 고통받는 여성의 삶을 말해왔다. 도저히 글로는 다 나타낼 수 없어 나무 널빤지에 그리고 플라스틱판에 사진과 그림을 새겨 넣는 작업을 통해 병든 기지촌의 삶을 보여줬던 그였다. 그토록 열정을 쏟았던 그의 작품은 지금 화실 한 켠으로 밀려나고 원초적 색을 입은 조롱박 작품이 거실 정면을 장식하고 있다.

“예술도 뭔가 갈급해야 시도가 되는데 여기서는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어요.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 속에 있으면 저절로 충족감을 느껴요. 이 완벽한 자연을 두고 뭘 하겠다는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지요.”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은 학일마을 주민이 되고 부터다. 마을을 가로질러 쌍령산으로 향하는 고개 위에 위치한 전원주택 대 여섯 채 가운데 목조가옥인 그의 집은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남편 조중래 교수(55·명지대)를 따라 용인에 이사와 학교 근처 교수마을에서 9년을 살다가 단지가 헐리면서 1년 여 집터를 고른 끝에 선택한 곳이다. 외지고 황량하다는 지인들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안일순씨는 한눈에 이 땅에 반해버렸다. 집터에는 청아하게 빼어난 소나무들이 둘러있고 마을의 푸른 논 위로는 오리 떼가 줄지어 떠다녔다. 터를 한번 본 이후 그는 병이 날 지경이 됐다. 가격협상이 되지 않아 애태우던 때 땅주인에게 걸려온 한통의 전화가 그를 이곳에 안착하게 만들었다.

“여기가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여자 땅이래요. 땅주인이 알고 지내는 스님이 이곳을 저에게 넘기라고 했대요. 제가 이 땅과 잘 맞고 여기서 많은 일을 할 거라고. 전 주인도 이곳에 굉장히 애착을 갖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저희가 원하는 가격에 땅을 팔았어요.”

집을 지으면서 그는 한 개의 공간을 더 만들었다. 화실과 겸한 공간의 이름은 아트스페이스 ‘움(womb)’. 여성운동에 관여하고 있는 그가 여자의 땅에 여성들을 위한 복합예술문화 공간으로 ‘자궁’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올 봄 이 공간에서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마당을 가졌다. 오리농법 체험과 함께 주부들이 일상에 쌓인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자연에서 풀어내는 문화공연을 기획했던 것. 여성을 위한 공간에서 여성들을 위해 벌이는 첫 공연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날 마을을 찾아온 이들은 농촌과 자연을 체험하려는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단위의 손님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획이 단순한 도시 여자의 발상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저 소란스럽기만 하고 농민이 배제된 채 또 다른 도시민들만 즐기게 하는 그런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도 솔직히 털어놓는다.

공간 활용과 나들이 손님들에게만 관심이 있던 그의 눈에 차츰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마을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훌륭한 인적자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복숭아과수원을 하고 있는 우리 마을 부녀회장 전순필은 보면 볼수록 예뻐요. 기미가 낀 얼굴이 얼마나 건강하고 밝은데요. 거기다 오토바이까지 타고 가는 폼은 정말 멋있어요. 지금 마을에 여성오토바이 대원이 4명 있는데 저보고 오토바이를 배워서 5인조 클럽을 조직하자고 그래요. 주민들 중에는 마을의 역사와 주변 산 구석구석에 뭐가 있는지 훤히 알고 있는 이도 있구요, 희귀한 나물의 이름까지 알고 캐러 다니는 이도 있어요. 사귀면 사귈수록 마을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명력에 매료돼요.”

안일순씨는 학일마을을 사랑하는 또 한 사람, 영국인 친구 구인 커크(Gwyn Kirk)로부터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미국 산타페에서 대학교수로 있던 구인은 인근 산약초 재배 마을주민들과 농학연대를 맺어 농민을 현장의 전문가로 활용해 왔던 것. 현재 의정부에 체류하고 있는 그는 매주 버스를 갈아타고 학일마을을 찾아오고 있다. 청정마을과 10년지기 안일순이 살고 있는 집에 반해서.

“그린투어리즘(Green tourism)은 경제와 문화와 환경이 결합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20년 전 팜스테이를 시작한 일본에서의 모토도 ‘지역개발은 사람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나들이 그린투어리즘만 생각했는데 1년을 지켜보니 이것이 농민들에게는 실제적 이득이 되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이제는 마을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전문가로 키워가는 기획으로 방향을 전환했어요.”

▲ 안일순씨 집 앞에는 유난히 키 큰 맨드라미가 피어있다.
개똥밭이 엄청난 생명을 낳았다며 그는 즐거워했다.
공급자 중심의 그린투어리즘

안일순씨는 농사체험과 문화예술을 접목한 행사를 월 단위로 기획, ‘씨알학당’이라 이름 지었다. 농민들이 강사로 나서 직접 가르치고 체험을 이끌어내는 공급자 중심의 그린투어리즘을 펼치겠다는 것. 그 첫 번째 시도로 복숭아농장 체험을 실시하는 9월 강좌에는 전순필 부녀회장이 강사로 나선다.

안일순씨는 “이 마을 이름 학일의 뜻이 매일매일 배운다는 데서 왔다”면서 “당장 경제적 이익은 없어도 마을 사람들이 자긍심을 갖게 되고 이러한 시도가 쌓이다 보면 장기적으로는 큰 자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요즘 그는 학일마을의 운동권(?) 여성들과 자주 어울린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운동하는 주민들 틈에 끼어 마냥 웃고 떠드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현관문이 닫혀 있어도 어느 틈엔가 고추며 양파 등 먹거리를 한가득 놓고 가는 그들. 안일순씨의 집에는 시간이 지나도 누가 두고 갔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한 제철 반찬거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여성해방론자 안일순은 어느덧 학일마을에서 생명과 자연과 여성과 평화와 평등을 삶의 키워드로 삼고 있는 에코페미니스트가 되어 버렸다.

그는 아무래도 조만간 다시 펜과 붓을 손에 쥘 것 같다. 이번에도 그의 글과 그림의 주제는 여성이 아닐까. 대지를 닮은 여성, 굵은 팔뚝에 검게 그을린 건강한 얼굴, 굵직한 땀방울을 매단 채 요란한 웃음을 터뜨리는 농촌 여자들이 강렬한 색채로 어우러진 그런 그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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